정치권이 다시 상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확대 등 과거 국회에서 무산되었던 내용들이 대부분 되살아났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타이틀 아래 주주권 강화와 지배구조 개편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업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방향이다. 법률로 기업 경영의 세부 사항까지 개입하는 방식은 자본시장의 신뢰를 높이기보다 오히려 시장의 역동성과 기업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
지배구조를 모든 기업에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자율성과 책임경영을 약화시킨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모든 상장회사를 대상으로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고, 감사위원 선출 시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전체 주주’로 확대하고, 전자주총·전자투표 등 절차적 요소까지 강제하려는 흐름이 포함됐다. 경영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명분은 이해할 수 있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방식은 기업의 운영 유연성을 해치고, 오히려 책임 경영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소액주주 권리 강화로 보이지만 외부 투기자본의 기업 개입 통로가 될 위험이 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노리는 세력은 집중투표제를 활용해 자신이 지지하는 인사를 이사회에 진입시키고,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 이런 구조는 경영의 불안정성을 높이고, 기업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의도와는 달리 기업 가치를 위협할 수 있는 구조적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다.
감사위원 선출 방식에까지 법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도 기업 경영의 기본 원칙인 '책임 있는 지배’ 구조를 흔들 수 있다. 개정안은 분리 선출 대상을 2명으로 늘리고,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해 대주주가 감사위원 선임에 사실상 관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책임은 지되 권한은 없는 구조로, 감시는 강화됐지만 경영 판단은 위축되고, 의사결정에서 주인이 배제되는 기형적 지배구조가 된다.
이사의 의무를 '회사에 대한 충실’에서 '주주 전체에 대한 충실’로 확대하는 것은 책임 범위를 모호하게 만들어, 이사의 법적 리스크를 높이고 경영 판단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주주 권익 강화를 위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필요한 소송 가능성을 키우고 이사들이 위험을 회피하는 보수적 의사결정에 안주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업의 도전과 혁신을 저해하고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기업 자율성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기업은 업종과 조직문화, 경영 전략에 따라 가장 적합한 지배구조를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획일적인 법적 강제가 아니라, 가능한 제도적 옵션을 제시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묻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지배구조를 선택하고, 그 성과를 시장이 평가하는 시스템이야말로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이다. 정부와 국회는 기업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국회는 일률적인 법 개정이 아닌, 기업 현실을 반영한 신중한 접근에 나서야 한다. 업종, 규모, 지배구조에 따라 경영 환경이 다양한데도 모든 상장회사에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려는 것은 과도한 개입이다. 투명한 지배구조는 중요하지만, 법으로 일괄 강제하기보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무리한 입법은 투자와 경영을 위축시키고,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훼손한다. 지금 국회에 필요한 것은 시장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균형 잡힌 입법 철학이다.
시장 자율성을 회복해야 할 때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기업의 현실과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경영 현장을 획일적인 법으로 통제하려 한다. 모든 문제를 입법으로 해결하려는 접근은 자율과 책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오히려 기업의 혁신과 장기 성장 가능성을 저해한다. 기업의 자율성은 단순한 경영의 자유가 아니라, 시장이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다. 자율과 책임이 조화를 이루는 환경에서 기업은 비로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기업의 자율성을 해치는 상법 개정안이 철회되길 바란다.
한규민 자유기업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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