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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급 사회: 생산적인 사람들 대 비생산적인 사람들

글쓴이
라이너 지텔만 2026-10-09

전 세계에 걸쳐, 우리는 우익 포퓰리즘에서뿐만 아니라 좌익 포퓰리즘에서도 상승을 보고 있다. 좌익 포퓰리스트들의 중심적인 구호는 더 큰 정의를 위한 투쟁이다. 정의의 요구는 하나의 큰 이점을 지니고 있다: 누구도 의견이 다르지 않다. 누가 정의에 반대하나? 그리고 누가 사정이 더 불의하게 되도록 요구할까?

그렇지만 정의가 의미하게 되어 있는 것은 보통 전적으로 불분명한 채로이다. 내가 불의하게 여기는 것으로 시작해 보겠다. 오늘 아침, 수백만의 사람이 일어나서 가치를 창출했다. 빵 굽는 사람은 아침 네 시에 빵을 구우며 자기 빵집에 있었다. 기업가는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하고, 고객들을 얻으며, 일자리들을 창출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배관공은 망가진 난방 시스템을 수선하기 위해 고객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일어나서 자기들이 어떻게 삶을 생산적인 사람들에게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좌익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부자들에 대한 적의를 일으키는 데 어떤 새 조세를 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평등 기회 관리는 어떤 규제를 위반할지 모르는 단어를 찾기 위해 일자리 광고들을 검색한다. NGO 활동가는 기업가들, 지주들, 혹은 자가용 자동차 운전자들에 대한 새 금지들, 규제들, 그리고 제한들을 위한 다음 운동을 전개한다. 한 집단은 생산하고, 수선하며, 발명하고, 투자한다. 다른 집단은 과세하고, 규제하며, 통제하고, 금지한다.

50년 전에, 사회학자 헬무트 셸스키(Helmut Schelsky)는 생산적인 일을, 삶을 더 편하고 더 안전하게 하는 물질적인 서비스들을 포함하여, 삶을 유지하고 향상하는 물질적인 재화들의 생산으로 정의했다. “이 구조적으로 ‘분리된 사회(divided society)’의 정의적 특징은,” 셸스키는 썼는데, “주민의 한 집단이 이 생산적인 일을 수행하고 그것으로부터 살아야 하지만, 다른 사회 집단이 다른 이익들을 희생시키고 자기 자신의 이익들을 추구하기 위해 이 생산적인 일을 착취한다는 점이다.”

한 집단, 생산적인 집단은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사는 재화들과 서비스들을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버는 것의 증가하는 몫을 비생산적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후자들 자신들은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이 집단은 강제적 부과금들, 무엇보다도 세금들로 산다. 대학교들은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 기술들−바꿔 말하면,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대가를 지급할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더욱더 많은 사람을 생산하고 있다. 비생산적인 사람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세금들과 공공 부채가 증가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의 자금을 대는 유일한 원천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끊임없이 더 높은 세금들과 더 많은 공공 부채를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많은 나라에서 생산적인 사람들의 수가 수년간 감소해 오고 있지만, 비생산적인 사람들의 수가 증가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을 예로 들어보면: 공공 부문 고용인들의 수가 2014년에 465만으로부터 2024년에 538만으로 증가했다−거의 16퍼센트 증가. 2025년까지는, 그 수치는 이미 약 550만에 도달했었는데, 여덟 고용인 중 대략 한 명이 이제 직접 국가에서 일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만약 사법 아래 조직되지만 지배적으로 공공 부문에 의해 소유되는 기관들과 회사들의 고용인들이 포함된다면, 그 숫자는 2024년에 약 694만만큼 높았다.

문제는 많은 정치인과 논평가가 늘 증가하는 수의 비생산적인 사람들에 의한 생산적인 사람들의 착취를 중심적인 쟁점으로서 역점을 두어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일반적인 용법에서, “정의(justice)”는 “평등(equality)”과 같다고 생각된다. 평등의 갈망은 오래됐다. 초기 이상향 소설들의 작가들은 평등에 거의 사로잡혔다. 거의 모든 이상향 비전에서, 사유 재산이 폐지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모든 차이가 제거된다. 오늘날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에 대해 불평하는 거의 어떤 사람도 그러한 급진적인 평등주의를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소득에서 차이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많은 사람은 즉각 이 차이들이 “너무 커서는” 안 된다고 보탠다. 그러나 무엇이 너무 크고, 무엇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심지어 “사회의 부의 분배(distribution of society’s wealth)”라는 표현조차도 오도한다. 사회가 생산하는 부란 없다; 오히려, 한 사회에서 부는 개인들이 생산하고 교환하는 것의 합이다.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Thomas Sowell)은,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처럼, 그저 나타나기만 한 소득이나 부의 기존 총액이 약간 정말로 있다면, 사회의 각 구성원이 얼마의 몫을 받아야 할지에 관한 도덕적 질문이 자연히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부는, 그는 강조하는데, 생산된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기만 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앵거스 티턴(Angus Deaton)은 진보가 항상 불평등과 손에 손잡고 간다고 주장한다. 역사 전체에 걸쳐, 진보의 과실들은 좀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더 나은 세계는 불가피하게 차이들을 창출하고, 조기 사망을 벗어나는 것은 불평등으로 끝난다고, 디턴은 주장한다.

평등을 증가시키는 것이 “사회적 불의(social injustice)”에 대한 불만을 줄일 것이라는 희망은, 내 견해로는, 근거가 부족하다. 예를 들면,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 평등이 최근 몇십 년간 대부분 서양 나라에서 막대하게 증가했지만, 남아 있는 불평등들에 대한 불만이 동시에 증가했다.


이 칼럼은 2026년 9월 24일에 작성되었다.
라이너 지텔만(Rainer Zitelmann)은 역사가이자 사회학자이고, ≪반자본주의자들의 열 가지 거짓말(In Defense of Capitalism)≫(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471405), ≪재무적 자유(Financial Freedom)≫(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777759), 그리고 ≪국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How Nations Escape Poverty)≫(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830632)의 저자다.
번역: 황수연[미제스와이어(https://mises.kr)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