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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플레이션? `쓸모 있는 바보들`과 정책 실패의 책임 떠넘기기

권혁철 / 2025-05-14 / 조회: 48

최근 대중 매체에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이란 신조어(新造語)가 종종 등장한다. 이는 탐욕을 뜻하는 영어 '그리드’(greed)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성시킨 용어로서, 기업들이 탐욕적으로 가격을 인상해 폭리를 취하면서 물가 상승을 부채질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곧, 기업들의 탐욕이 물가 상승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조어의 등장은 경제 현실의 원인을 정확히 반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나아가 정책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까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혹은, 기존의 용어를 그 진정한 의미만 변형시켜 계속 사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합성어 역시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용어는 2022년 6월 미국 민주당에 의해 처음 제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물가가 40여 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오르자, 민주당 일각에서 대기업의 탐욕이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면서 이 용어를 거론했다고 한다. 심지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정유사인 엑손모빌이 기름값을 올려 “지난해 하느님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고 비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의 식품 및 외식업체들의 가격 인상과 관련해 이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동시에 기업들의 탐욕을 비난하는 기사들도 대중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며칠 전에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범죄심리학 교수가 이 용어를 언급하면서 '기업의 탐욕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발언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해당 분야 전문가를 우습게 취급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의 의견이 마치 진실인 양 대중 담론을 지배하는 지경이 되었다곤 하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범죄심리학 전문가가 경제 문제나 경제 현상의 원인에 대해 논하고, 거꾸로 경제 전문가가 살인이나 강도 등 범죄 행위와 구체적인 범죄 수사 방향이나 방식 등에 대해 논한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진리이고 사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라면 건전하고 온전하게 운영·유지되는 사회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이른바 '만물박사’들은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레닌(Lenin)이 말했던 '쓸모 있는 바보’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점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물가 폭등의 책임이 기업의 탐욕에 있다고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물가 폭등의 진짜 원인 제공자들이 의도하는 목적 달성에 큰 도움을 주는 '쓸모 있는 바보’ 짓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물가 상승의 진짜 원인은 정부 통화정책의 실패와 그로 인한 화폐 가치 하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화폐량을 늘리지 않는 한 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할 수는 없다. 물론, 화폐량이 변하지 않고 일정하더라도, 일부 품목의 물가가 ―수요와 공급 조건의 변화로 인해―상승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또 다른 일부 품목의 물가가 ―마찬가지 수요와 공급 조건의 변화로 인해―하락할 것이기 때문에, 전반적인 물가 상승은 일어날 수가 없다. 결국, 우리가 현재 인플레이션이라 부르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의 원인은 정부가 화폐를 대량으로 인쇄해서 풀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정부와 정치인들은 통화량을 팽창시켜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일으킨 자신들의 책임을 은폐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정치인들의 요구에 잘 부합한다. 이렇듯,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기업의 탐욕에 있다고 호도하는 일종의 언어 전략이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다. 이 용어가 최악의 인플레이션이라는 평가를 받던 당시 미국의 집권 여당에서 처음 제기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왜 이런 용어를 사용했을까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의 원인 제공자가 자신들임을 숨길 수 있고, 게다가 기업을 끌어들여 반기업정서에도 편승해 정치적 이득까지 얻을 수 있어 1석 2~3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용어가 바로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인 셈이다.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통화 정책에 실패하여 물가 폭등을 일으킨 진짜 책임자인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을 가리고, 그 책임과 분노를 기업으로 돌리게 만드는, 정치적으로 왜곡된 용어이다. 이런 용어는 경제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을 은폐하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일상적인 행태를 탐욕이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정책과 화폐 가치 안정과 관련해 올바른 해법을 심사숙고하여 찾아내서 실행으로 옮기는 일이다.



권혁철 자유시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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