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E Home

[협력사의 재발견②] AI 시대 `상생이 곧 경쟁력`…달라진 재계 생존 공...

글쓴이
자유기업원 2026-07-09 , EBN 산업경제

[편집자주]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중심으로 산업 경쟁의 판이 바뀌면서 협력사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협력사가 단순 납품업체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기술 개발과 생산 안정성을 함께 책임지는 산업 생태계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실제 AI 서버, 첨단 패키징, 전력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차세대 산업은 대기업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다. 협력사의 기술력과 재무 건전성이 곧 대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에 본지는 삼성·SK·LG의 상생협약 사례를 시작으로 AI 시대 상생의 전략적 의미와 주요 그룹 총수들이 협력 생태계 구축에 직접 나서는 배경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재계의 상생 공식이 바뀌고 있다. 과거 상생이 납품대금 지급과 거래 관행 개선에 무게를 뒀다면 AI 시대의 상생은 대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공급망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협력사는 더 이상 정해진 부품을 납품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신제품 개발과 생산 안정성, 공급망 리스크 대응을 함께 책임지는 공동 성장의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9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SK, LG 등 주요 그룹이 협력사 생태계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 전환이 제조업과 서비스 등 산업 전반으로 확산, 협력사가 공급망 안정과 신사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어서다.


◆삼성, 반도체·디스플레이·전자부품 공급망서 협력사 기술력 부각


그룹별로 보면 삼성의 공급망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자부품을 축으로 움직인다. AI 서버와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커질수록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칩 설계와 생산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반도체가 실제 서버와 기기 안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패키지 기판, 인쇄회로기판(PCB), 정밀 가공, 검사 등 후방 공정의 기술력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


삼성전자와 대덕전자, 대일전자의 협력 구조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대덕전자는 반도체 패키지 기판과 PCB 분야에서 삼성전자 공급망을 뒷받침해 온 협력사다. AI 서버와 네트워크 장비에는 고성능 칩을 안정적으로 연결하고 빠르게 신호를 전달하는 기판 기술이 필수적이다. 삼성전자가 AI 반도체와 고성능 서버 시장에 대응하려면 칩 자체의 성능뿐 아니라 이를 받쳐주는 기판의 신뢰성도 함께 확보돼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2차 협력사인 대일전자의 역할도 중요하다. PCB 홀 가공 등 후방 공정은 기판의 품질과 수율을 좌우하는 영역이다. 기판이 고다층화되고 회로가 미세화될수록 작은 가공 오차도 품질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삼성전자의 AI 반도체 공급망은 1차 협력사의 기판 기술과 2차 협력사의 정밀 가공 역량이 함께 맞물려야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삼성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다. 폴더블 OLED와 IT용 OLED, 차량용 디스플레이는 패널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접고 펴는 구조를 견디는 부품, 얇고 정밀한 금속 가공, 모듈 조립 안정성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삼성디스플레이가 고부가 OLED 시장을 넓히는 과정에서 파인엠텍, 케이피테크놀로지 같은 협력사의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파인엠텍은 폴더블 OLED 패널을 지지하는 메탈 플레이트와 내장 힌지 등 정밀 부품을 통해 삼성디스플레이의 차세대 폼팩터 경쟁력을 뒷받침한다. 폴더블 제품은 반복 사용 과정에서 내구성과 정밀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협력사의 부품 품질이 곧 완성품 신뢰성으로 이어진다. 케이피테크놀로지의 정밀 에칭·가공 기술 역시 얇고 가벼운 OLED 부품 구현에 필요한 기술 고리다. 삼성디스플레이가 패널 성능을 끌어올려도 협력사의 정밀 부품이 따라오지 못하면 제품 완성도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기의 경우도 협력사와의 기술 결합이 사업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삼성전기는 MLCC, 카메라모듈, 반도체 패키지 기판 등을 주력으로 한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시장이 커지면서 고성능 패키지 기판과 고신뢰성 부품 수요가 늘고 있는데, 이 영역은 정밀 장비와 부품 기술이 생산성과 품질을 좌우한다.


이오테크닉스의 레이저 장비 기술은 반도체와 PCB 제조 공정에서 미세 가공 정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기판이 얇아지고 회로가 복잡해질수록 레이저 드릴링, 커팅, 마킹 등 정밀 공정의 중요성은 커진다. 알피에스가 공급하는 에어베어링 스핀들, 진공척 등 장비 핵심 부품은 가공 과정의 진동과 오차를 줄여 생산 안정성을 높인다. 삼성전기가 고부가 기판과 서버·전장용 부품으로 사업을 확장하려면 이 같은 협력사의 정밀 장비·부품 기술이 함께 고도화돼야 하는 것이다.


◆SK, HBM·AI 인프라 경쟁력은 소재·장비·운영 협력망에서 나온다


SK의 협력사 생태계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AI 인프라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SK하이닉스가 글로벌 HBM 시장에서 주도권을 이어가려면 메모리 설계와 양산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정에 필요한 소재, 특수가스, 장비 부품, 모듈, 검사, 패키징 공급망이 동시에 안정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티이엠씨는 이 과정에서 SK하이닉스의 공정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협력사다. 반도체 공정에서 특수가스는 식각, 증착, 세정 등 여러 단계에 쓰인다. 공정이 미세화되고 HBM처럼 고난도 제품 비중이 커질수록 가스의 순도와 공급 안정성은 수율과 품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수요에 맞춰 생산을 늘리려면 소재 공급망 안정성이 선행돼야 한다.


피에스디이와 같은 2차 협력사의 역할도 생산 현장에서는 중요하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부품과 모듈은 공정 장비의 안정성을 좌우한다. 장비 한 부분의 성능 저하나 부품 수급 차질이 생산 중단과 수율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2차 협력사의 기술력과 납기 대응력은 SK하이닉스의 양산 경쟁력을 떠받치는 기반인 셈이다.


SK하이닉스가 협력사에 연구개발 지원과 테스트베드 기회를 제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협력사가 개발한 소재·부품·장비를 실제 양산 환경과 유사한 조건에서 검증하면 상용화 속도를 높이고 공급망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신규 기술 도입 부담을 줄이고, 협력사는 기술 완성도를 높여 공급망 안에서 더 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SK텔레콤의 협력사 생태계는 AI 인프라 영역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 SK텔레콤은 AI 데이터센터와 AI 클라우드, 통신 인프라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는 GPU와 서버를 갖추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네트워크 구축, 데이터센터 운영, 스토리지 관리, 보안, 시설 관리, 장애 대응 체계가 동시에 맞물려야 한다.


소프트웍스는 데이터센터 운영과 IT 인프라 관리 역량을 통해 SK텔레콤의 AI 인프라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AI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중단 없이 운영돼야 하는 만큼 운영·유지보수 협력사의 대응 능력이 서비스 품질로 이어진다. 지앤에스기술과 같은 네트워크 구축 협력사도 AI 서비스 확산 과정에서 중요하다. AI 서비스 이용량이 늘수록 네트워크 품질과 현장 구축 역량은 통신사의 고객 대응력과 직결된다.


◆LG, AI 가전·OLED·기판 사업 확장도 협력사 역량과 맞물려


LG는 가전, 디스플레이, 전자부품, 데이터센터 냉각 솔루션으로 이어지는 사업 포트폴리오 안에서 협력사와의 시너지를 키우고 있다. LG전자는 프리미엄 가전과 전장, 냉난방공조 사업을 확대하고 있고 LG디스플레이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차량용 디스플레이, LG이노텍은 카메라모듈과 반도체 기판을 미래 성장축으로 삼고 있다.


LG전자와 미래코리아, 경기정밀화학의 협력 관계는 가전 공급망이 단순 조립 구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프리미엄 가전과 AI 가전은 모터, 컴프레서, 금형, 플라스틱·화학 소재, 전장부품, 제어 소프트웨어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완성된다. 소재와 부품의 품질, 금형 정밀도, 공정 안정성이 제품 내구성과 에너지 효율, 생산성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 같은 공급망 역량은 LG전자가 AI 가전과 냉난방공조, 데이터센터 냉각 솔루션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고성능 서버가 밀집돼 발열과 전력 소모가 큰 만큼 냉각 효율이 운영비와 서버 안정성을 좌우한다. LG전자가 가전에서 축적한 모터·컴프레서·열관리 기술을 기업 간 거래(B2B) 인프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협력사의 소재, 정밀가공, 부품 품질, 납기 대응력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LG디스플레이와 탑런토탈솔루션, 거림테크의 관계는 디스플레이 공급망 재편과 맞닿아 있다. LG디스플레이가 OLED와 차량용 디스플레이 등 고부가 제품에 집중할수록 모듈과 부품, 정밀가공을 맡는 협력사의 역할은 커진다. 탑런토탈솔루션은 금형 설계·제작, 사출, 회로모듈 등 부품 기술을 바탕으로 디스플레이 모듈 공급망에서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LG디스플레이가 핵심 패널 기술과 고부가 제품 개발에 집중하는 동안 협력사가 생산 효율을 보완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거림테크와 같은 정밀가공 협력사도 LG디스플레이의 고객 대응력과 연결된다. OLED와 차량용 디스플레이는 얇고 가벼우면서도 내구성과 신뢰성을 갖춰야 한다. 특히 차량용 디스플레이는 완성차 고객이 요구하는 품질 기준이 높다. 정밀가공과 부품 품질이 흔들리면 패널 업체의 수율과 납기, 고객 신뢰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협력사의 생산 안정성이 LG디스플레이의 고부가 제품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이유다.


고광용 자유기업원 정책실장은 "최근 상생협약은 원청이 협력사와 공동 연구개발, 시설 투자, 대금 지급 구조 개선 등을 통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일종의 거버넌스 구축으로 볼 수 있다"며 "AI 반도체 생산라인과 첨단 제조 공급망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원청과 협력사의 유기적 구조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고 실장은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이라며 "상생협약은 협력사의 기술 개발과 생산 여건을 개선하는 동시에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노무·공급망 리스크를 사전에 줄이는 대응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 환경 변화도 주요 배경으로 꼽았다. 고 실장은 "노란봉투법 논의 이후 원청 사용자성 확대 문제가 부각되면서 대기업 입장에서는 협력사와의 관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2·3차 협력사까지 포함한 상생 구조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갈등 비용을 줄이고 공급망 전반의 안정성을 높이려는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