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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로 다시 쓰는 『총, 균, 쇠』

글쓴이
백승현 2026-05-27

물류센터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물건이 들어오고 나간다. 끝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택배 상자들의 바코드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울 혹은 경기와 같은 수도권이 찍혀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땀이 배어드는 물류센터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이 거대한 부와 인구의 집중이 과연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에서 인류 문명의 불평등이 인간의 능력이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지리적 운명)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점점 거대해지는 전 세계의 도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주장은 절반만 맞다. 오늘날 수많은 자원과 인재를 서울로 빨아들이는 현대판 총, 균, 쇠는 그가 주장하는 주어진 자연환경뿐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이기심과 시장 메커니즘이 빚어낸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총과 쇠가 문명의 운명을 결정했다면, 현대 서울에서 그 역할은 자본과 물류 인프라가 한다. 쿠팡(Coupang) 물류센터에서 아르바이트하다 보면 물류를 지역별로 구분하여 적재하는 업무가 있다. 그중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이 모두 있지만 수도권은 예를 들어 인천이라는 하나의 지역일지라도 인천 11, 인천 12, 인천 31등 여러 개로 구분 짓는다. 이는 수도권으로 향하는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아 그것들을 구분한 것이다. 이 세분화된 지역 코드 체계는 단순한 분류로 그치지 않는다. 수도권으로 향하는 물량이 압도적이기에, 쿠팡은 수도권 곳곳에 물류센터를 추가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명령으로 수도권에 더 많은 물류센터가 지어진 것이 아니다. 수도권 소비자 밀도가 압도적이므로 소비자가 몰린 곳에 배송망을 깔아야 이윤이 나기 때문에, 자본은 자연스럽게 수도권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프라가 완성되자, 더 많은 판매자와 소비자가 수도권으로 몰려들었다. 즉, 자본이 인프라를 낳고, 인프라가 자본을 불러들이는 이 순환은 누군가의 기획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결과다.

병균이 사람과 사람의 접촉으로 퍼지듯, 지식과 혁신도 사람이 밀집한 곳에서 가장 빠르게 전파된다. 이제 아르바이트 장소인 물류센터에서 잠시 벗어나 대학교 동아리 방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학생들은 그곳에 처음부터 위대한 학술 교류와 같은 것을 위해 동아리 방에 가지 않는다. 보통 공강 시간을 보내거나, 사람들을 만나러 가거나, 공부하러 가는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모여든다. 그런데 동아리 방 소파에 앉아 쉬다 보면 어떠한 과목에 대한 시험 정보, 물류센터가 아닌 더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는 소식 또는 공모전에 같이 나갈 팀원을 구하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 개인의 편의를 위해 모인 좁은 공간에서 의도치 않은 고급 정보가 흐르는 혁신의 생태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집적경제의 긍정적 외부효과이다. 이것은 비단 동아리 방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백만 명이 밀집한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가 바로 이 동아리 방의 거대한 버전이다. 각자의 이익을 좇아 몰려든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낸 이 혁신의 생태계야말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자 하이에크가 말한 자생적 질서의 공간적 발현이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쉴 새 없이 지나던 그 택배 상자들의 목적지와 좁게는 동아리 방, 넓게는 서울 도심 전체에서 퍼져 나가는 사람들의 혁신 아이디어가 결국 말해주는 것은 하나다. 다이아몬드가 말한 총, 균, 쇠가 지리적 운명이었다면, 서울의 총, 균, 쇠는 시장이 만든 운명이다. 수십 년간 공공기관 이전과 수도권 억제 정책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팽창을 끝내 막지 못한 것은, 이 흐름이 행정 명령이 아닌 수백만 명의 합리적 선택이 만들어낸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총, 균, 쇠를 인위적으로 되돌릴 수 없었듯, 시장이 만든 질서 역시 규제로 거스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흐름을 막는 장벽이 아니라,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읽고 그 위에 올라타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