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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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성윤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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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 주유소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며 자주 생각했다. 세상에는 집도 차도 이렇게 많은데, 평생 남을 치료하고 해외 의료봉사를 다니던 아버지에게는 왜 집 하나, 차 하나 남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희귀 뇌질환으로 쓰러진 뒤 우리 집은 빠르게 무너졌다. 학교가 끝나면 밤늦게까지 주유소에서 일했고, 새벽에는 아파트 주차장을 돌며 세차를 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진학을 포기했다. 그때 내게 가난은 잔고가 적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파도 쉬지 못하고, 치료받아야 할 때 비용부터 계산하며, 하고 싶은 일보다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먼저 헤아리는 상태였다.
간병하다 허리를 다쳐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며칠 누워 있으라고 했다. 교과서대로의 처방이었지만, 일을 멈추면 다음 달 생계가 끊기는 사람에게 그 처방은 사치였다. 약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꾸는 일은 법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포기한 14년 사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년간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하며, 자기 권리를 몰라 당하고도 당한 줄 모르는 사람들의 민원을 처리했다. 법조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때 굳어졌고, 서른셋에 뒤늦게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런 나에게 『노예의 길』은 불편한 책이었다. 하이에크는 내가 끝까지 밀어붙여 보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목적에 동의한다 해도, 무엇이 정의로운 배분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제8장의 제목 '누가, 누구를?'이 오래 남았다. 레닌이 쓰던 이 물음처럼, 사회 전체를 하나의 계획 아래 놓는 순간 누군가는 누가 누구를 지휘하고 누구에게 어떤 삶의 지위를 배분할지 정해야 한다. 서로 다른 목적들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계획자는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의 중요성까지 결정하게 된다고 하이에크는 쓴다. 계획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순서를 정하는 일이 된다. 게다가 우리가 기대는 '공정한 임금'이라는 감각조차 우리가 아는 경쟁체제에서 나온 것이어서, 경쟁이 사라지면 기준도 함께 사라진다.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결국 권력을 쥔 누군가의 견해다. 평등과 공익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것을 구체적 배분으로 옮기는 순간 누군가는 타인의 삶에 순서를 매기는 권력을 갖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선입견도 고쳤다. 하이에크는 제9장에서 두 종류의 보장을 나눈다. 건강과 일할 능력을 지키기에 충분한 최소한의 음식과 주거와 의복이 모두에게 보장될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질병과 사고처럼 보험으로 대비할 수 있는 위험 앞에서는 국가가 사회보험의 조직화를 도울 만하다고 그는 쓴다. 다만 그 보장이 경쟁 자체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확장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정 집단의 지위와 소득을 지켜 주는 보장에 대해 그는, 한 업종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모든 제약이 그 바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안전을 줄인다고 말한다.
내가 대학을 포기한 것은 어떤 진입 장벽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돈이 없었다. 그러니 이 문장을 내 사정에 곧바로 포갤 생각은 없다. 다만 하이에크가 여기서 '형편이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부른 자리에는 서 본 적이 있다. 안에서 보면 보호인 것이 바깥에서는 닫힌 문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그 바깥에서 일해 본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 구분을 배운 뒤에야 내가 받아온 도움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도움들은 내 자리를 정해 주지 않았다. 다만 내가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를 데려다 놓았을 뿐이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도움과 사람을 그 자리에 붙들어 두는 도움은 다르다는 것, 이 차이를 언어로 갖게 된 것이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을 다시 세운 것은 누가 좋은 삶의 모양을 정해 주어서가 아니었다. 돈이 없을 때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뒤늦게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장학제도를 찾아다녔으며, 교류학생 제도에 지원해 목표하던 학교의 강의실에 앉아 보았다. 선택지는 넓지 않았지만 무엇을 공부할지, 어떤 기회를 붙잡을지는 내가 정했고 그 결과와 책임도 내 몫이었다. 하이에크가 말한 경제적 자유가 그것이었다. 선택의 권리와 함께 거기에 따르는 위험과 책임까지 지는 자유.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인생을 대신 설계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바닥이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다. 가난을 겪었기에 오히려 더 믿는다. 달라진 것은 질문의 수다. 예전의 나는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만 말했다. 법을 공부하면서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이 책을 덮은 뒤에는 하나가 더 늘었다. 도우면서도 그 사람의 선택을 빼앗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6장에서 하이에크는 법을 신호등에 빗댄다. 신호등을 만들어 주는 것과 어느 도로를 택할지 지시하는 것은 다르다. 좋은 규칙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특정한 결과를 주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을 만큼 일반적이어야 하며, 그런 규칙만이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계획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 삶의 결정을 통째로 국가에 맡기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보다 배분을 기다리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바닥은 내어주되 방향은 스스로 정하게 하는 것. 열아홉의 그 겨울에 우리 가족에게 필요했던 것도 결국 그런 규칙이었다. 며칠 쉬라는 처방이 사치가 되지 않는 바닥 위에서, 내 삶의 방향은 내가 정하는 주인으로 사는 것. 훗날 법을 다루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내가 만지는 법이 누군가의 길을 대신 정해 주는 명령인지 각자의 길을 밝혀 주는 신호등인지 먼저 물을 것이다. 『노예의 길』이 법을 공부하는 내게 남긴 기준이자, 앞으로 오래 붙들고 갈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