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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라는 이름의 족쇄, 설계주의의 파산을 목격하다

글쓴이
임한호 2026-08-26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한 세상을 꿈꾼다. 결핍이 없고, 불평등이 해소되며, 모두가 공평하게 풍요를 누리는 유토피아. 그러나 역사는 이 달콤한 꿈을 실현하려 했던 시도들이 인류를 가장 참혹한 지옥으로 이끌었음을 거듭 증명해 왔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펴낸 《노예의 길》은 단순한 경제학 서적이 아니다. 그것은 ‘선의’로 포장된 국가의 기획과 통제가 어떻게 개인의 영혼을 잠식하고, 마침내 전체주의라는 괴물을 낳는지를 차근차근 해부한 서늘한 예언서이자 경고문이다.


하이에크가 책 전반에서 일관되게 던지는 경고의 핵심은,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새로운 자유의 길’이 실은 예속과 독재로 통하는 대로(大路)라는 데 있다. 그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불신하고 정부가 모든 것을 계획할 수 있다고 믿는 ‘설계주의적 오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회적 선을 달성하겠다는 집단적 목표가 설정되는 순간 국가 권력은 무제한으로 비대해지고, 개인의 다채로운 가치와 선택은 ‘대의’라는 이름 아래 짓밟힌다는 것이다. 계획이 정교해질수록 개인이 스스로 판단할 여지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점이 이 책의 냉정한 통찰이다.


이 경고는 이론에 머물지 않는다. 하이에크의 통찰은 반세기 뒤 베네수엘라에서 비극적으로 재현되었다. 1970년대 남미에서 가장 부유했던 이 나라는, 1990년대 말 우고 차베스 정권이 빈민구제와 불평등 해소라는 선의적 목표를 내걸고 무상 복지를 확대하며 생필품 가격을 강제로 통제하면서 급변했다. 가격 통제는 생산자의 의욕을 꺾고 공급의 전면 중단을 낳았다. 마트의 매대는 텅 비었고 화폐 가치는 종잇조각보다 못하게 추락했다. 2020년대 베네수엘라 국민의 90% 이상이 빈곤선 아래로 추락했고, 국민들은 빵 한 조각을 배급받기 위해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가 되었다. 고귀한 선의로 출발한 정책이 국민 전체를 국가 배급망에 종속된 ‘노예’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설계주의의 잔혹사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우리 부동산 시장에서도 비춰졌다. 서민의 주거 안정을 돕겠다는 선의로 도입된 임대차 계약 통제 법안들은 시장의 자생적 메커니즘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가 시행된 직후 시중의 갱신 물량이 묶이면서 신규 전세 매물은 눈에 띄게 줄었고, 좁아진 매물을 두고 경쟁이 붙으며 전세가도 함께 치솟았다. 그 여파로 집 없는 서민들이 서울 변두리로 밀려나는 ‘전세 난민’ 문제가 불거졌다는 지적이 많다. 다만 같은 시기 금리 인하로 인한 전세가 급등을 오히려 완충했다는 반론도 있는 만큼, 이 인과관계를 단정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선의로 설계된 개입이 시장의 반응까지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는 하이에크의 통찰만큼은 곱씹어볼 지점이다.


하이에크는 책의 후반부에서 또 하나의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왜 가장 사악한 자들이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되는가.” 국가가 모든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계획사회에서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인물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권력의 정점에 서기 쉽다는 지적이다. 경제적 선택의 자유를 빼앗긴 개인은 도덕적 책임감마저 서서히 잃는다. 모든 것을 국가가 대신 결정해 주는데 개인이 굳이 도덕적으로 고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책임감 없는 대중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통치자가 결탁할 때, 사회는 급격히 부패하고 전체주의의 늪으로 빨려 들어간다.


《노예의 길》을 덮으며, 오늘날 우리가 숭상하는 ‘공공(公共)’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칼날을 다시 응시하게 된다.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국가의 약속이 실은 내 삶의 결정권을 조금씩 가져가는 과정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진정한 도덕과 연대는 국가의 강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 속에서만 싹튼다.


이 책은 과거 전체주의에 대한 고발장에 그치지 않는다. 자유를 숨 쉬듯 당연히 누리며 그 무게를 잊어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경종이다. 국가의 기획이 촘촘해질수록 개인의 판단은 설 자리를 잃는다는 하이에크의 문장은, 완벽을 약속하는 손일수록 그 이면을 먼저 의심해야 한다는 오래된 지혜를 다시 일러준다. 나는 그 의심을 습관으로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