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한국경제에서 대기업은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와 누적된 규제는 대기업의 경쟁력을 제약할 뿐 아니라, 새로운 대기업의 등장 자체를 가로막고 있다.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규제 부담이 급증하고 혜택이 사라지는 제도 환경에서 중소·중견기업은 성장을 회피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한국경제의 진짜 문제는 대기업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기업이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산업생태계는 대기업을 억누르는 데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장과 혁신이 보상받는 자유로운 경쟁 질서만이 그 토대가 된다.
한국경제의 성장사에서 대기업의 역할은 압도적이었다. 1960년대 이후 수출 주도 산업화의 선두에 선 것은 대기업이었고,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 등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보한 산업은 대기업이 이끌어 온 영역이다. 대기업은 기술을 도입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과정에서 한국경제의 체급 자체를 바꿔 놓았다. 대기업이 벌어들이는 수출 외화, 창출하는 고용, 납부하는 세금, 그리고 협력업체를 포함한 산업 전반에 대한 파급효과를 고려하면, 대기업 없는 한국경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대기업 논쟁은 경제적 사실보다 정치적 프레임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구호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대기업은 마치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존재가 아닌 원죄를 가진 존재처럼 다루어져 왔다. 대기업이 성장하면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투자를 늘리면 문어발 확장이라 비판받으며, 수익을 내면 독과점 이윤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이러한 반기업 정서 위에서 규제는 누적되고,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대기업 규제 강화를 경쟁적으로 공약한다. 대기업 정책은 경제적 합리성보다 정치적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가 고착되었다. 대기업을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경제가 앞으로 어떤 성장 생태계를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 생태계에서 기업의 성장을 장려할 것인가, 억제할 것인가의 문제다.
대기업 논쟁의 오래된 착시
대기업이 양극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거의 상식처럼 통용되지만, 논리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 격차와 생산성 격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격차의 원인을 대기업의 존재 자체에서 찾는 것은 인과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대기업이 높은 임금을 지불하고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는 것은 시장에서 경쟁하여 얻은 성과다. 중소기업의 낮은 생산성과 임금은 대기업이 빼앗아서가 아니라 중소기업 자체의 혁신 부족, 영세한 규모, 보호에 안주하는 경영 행태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 대기업을 억누른다고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한국경제의 문제는 대기업이 너무 많아서인가, 아니면 새로운 대기업이 충분히 등장하지 못해서인가? 답은 후자에 가깝다. 산업화 초기에 성장한 기업집단 이후로 새로운 글로벌 기업이 등장하는 속도는 뚜렷이 둔화되었다.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고착된 것처럼 보이는 진짜 이유는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지 못하는 환경에 있다. 새로운 대기업이 계속 등장해야 기존 대기업도 경쟁 압력을 받고, 시장 전체의 혁신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한국의 제도 환경은 정반대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기업이 커지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벌하는 구조다.
재벌·대기업 규제가 공정성을 높인다는 주장도 착시에 기반한다. 경제력 집중 억제, 지배구조 개선, 공정거래 규제는 각각 명분을 갖고 있지만, 규제가 누적될수록 기업의 경영 자율성이 침식된다. 기업이 어떤 사업에 진출하고, 어디에 투자하며, 어떤 방식으로 구조조정할지를 시장이 아닌 정부와 규제기관이 사실상 결정하는 구조에서 기업가정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규제의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도 선한 것은 아니다. 정부의 규제 실패는 시장의 실패보다 더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
성장하지 않으려는 기업의 역설
한국경제에서 가장 심각하면서도 가장 간과되는 문제가 중소·중견기업의 성장 정체다. 한국에서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 수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지만, 이들 가운데 중견기업으로, 나아가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기업은 극히 드물다. 이 현상을 기업가정신의 부족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진짜 원인은 제도에 있다.
대기업의 비중이 낮다는 것은 곧 대다수 근로자가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한 중소기업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대기업은 체계적인 인사 관리, 안정적인 고용 조건, 높은 복리후생을 제공할 여력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경기 변동에 취약하고 고용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근로자의 고용 안정성과 삶의 질을 높이려면 대기업의 수와 비중 자체가 늘어나야 한다. 기존 대기업을 규제하는 것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더 많은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해야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근로자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진다.
한국의 제도 구조에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규제 부담은 급격히 늘어난다. 중소기업에게 주어지는 세제 혜택, 금융 지원, 공공조달 우대, 각종 정책 지원은 기업이 일정 규모를 넘어서는 순간 사라진다. 반면 대기업으로 분류되면 경제력 집중 규제, 공정거래 규제, 지배구조 규제, 추가적 세제 부담이 한꺼번에 뒤따른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규모를 키워서 얻는 이익보다 잃는 혜택과 새로 떠안는 비용이 더 크다. 이런 환경에서 기업이 성장을 회피하는 것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제도가 유도한 합리적 반응이다.
이것이 바로 피터팬 증후군의 본질이다. 기업이 자라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 벌을 받는 제도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기업가에게 도전 정신을 호소하면서 동시에 성장의 대가로 규제와 불이익을 부과하는 것은 모순이다. 대기업이 되는 순간 불이익이 급증하고 중소기업으로 머물 때 보호와 혜택이 과도하게 유지된다면, 어떤 기업가가 성장을 선택하겠는가?
중소기업 보호 정책도 같은 맥락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보호의 본래 취지는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호가 장기화되고 고착되면서 보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대기업의 사업 영역 제한, 납품 단가 규제 등은 단기적으로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중소기업의 혁신 동기를 약화시키고 보호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려는 유인을 강화한다. 보호가 길어질수록 보호받는 기업은 경쟁력을 잃고, 보호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체질이 된다. 이는 중소기업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가두는 것이다.
이 같은 구조에서 산업생태계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굳어지고, 경제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기업층이 빈약해진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독자적 기술과 시장을 가진 중견기업이 두텁게 존재해야 산업생태계가 건강해지지만, 한국에서는 이 중간 지대가 구조적으로 비어 있다. 이 허리의 빈곤은 제도의 산물이다.
세계적 기업과 규제 국가의 딜레마
한국경제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세계적 기업을 유지·육성해야 하고, 국내에서 생산성이 낮은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영세 사업장의 노동자 문제를 방치할 수 없으며, 미중 전략경쟁·공급망 재편·기술패권 경쟁·탄소규제 등 급변하는 국제 환경에 대응해야 한다. 이 세 과제는 모두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의 정책을 요구하며,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하는 단순한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한국의 정책 기조가 이 세 가지 과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가장 정치적으로 손쉬운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점이다. 세계적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기업의 자율적 의사결정, 신속한 투자, 유연한 인력 운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는 대기업의 사업 영역 확장을 문어발 경영이라 비판하고, 투자 결정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며, 고용 유연성 제고를 노동자 착취로 몰아간다. 글로벌 경쟁의 현실과 국내 정치의 논리 사이에서 기업은 양쪽 모두에서 압박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
국제 환경의 변화는 이 딜레마를 더욱 심화시킨다.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한국 대기업은 양쪽 시장에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압력은 커지고 있다. 공급망 재편은 기존의 비용 효율적 생산 체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고, 탄소규제와 기술통제는 새로운 비용과 제약을 더한다. 이런 환경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경영 자율성과 제도적 예측 가능성이다. 선거 주기에 따라 규제가 강화되었다가 완화되는 변동,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정책 기조, 정치적 바람에 흔들리는 제도 환경은 기업의 장기 투자를 위축시키고 제도 신뢰를 무너뜨린다.
세계적 기업이 나오는 것은 기존 대기업 몇 개를 보호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기업이 낮은 진입장벽 속에서 시장에 들어오고, 혁신과 투자를 통해 성장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기존 강자와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대기업이 등장해야 기존 대기업도 경쟁 속에서 혁신을 지속하게 된다.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는 시장에서 기존 기업은 혁신의 동기를 잃고, 산업 전체가 정체에 빠진다. 경쟁은 기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살리는 메커니즘이다.
지속가능한 생태계의 조건
지속가능한 산업생태계는 정부의 설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장에서 자생하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특정 기업을 보호하거나 억제하는 데 있지 않다.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한국경제의 문제를 대기업의 존재에서 찾는 시각은 틀렸다. 새로운 대기업이 나타나지 못하고 중소·중견기업이 성장을 회피하는 구조, 그것이 진짜 문제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산업 정책도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없다.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보호와 규제를 나누는 이분법적 제도 설계부터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기업이 성장할수록 규제 부담이 급격히 늘고 기존 혜택이 사라지는 구조에서 성장보다 현상유지가 합리적 선택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제도가 성장을 벌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대기업에 대한 특혜가 아니다. 기업 규모와 무관하게 투자, 혁신, 고용 창출이 보상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세제와 규제가 기업의 성장 단계에 따라 연속적으로 적용되어야지, 특정 규모를 넘는 순간 단절적으로 불이익이 가해지는 제도는 시장의 원리에 반한다.
기업의 자율적 구조조정도 생태계의 핵심 조건이다. 시장 환경이 변할 때 기업이 사업을 재편하고 비효율을 정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영 활동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구조조정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크고, 고용 조정의 유연성은 낮으며, 사업 재편에 수반되는 규제 비용이 높다.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에 개입하고 지연시킬수록 비효율은 누적되고, 결국 더 큰 규모의 위기로 귀결된다. 기업이 스스로 진화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기업도 살리고 경제도 살리는 길이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세제의 국제경쟁력 저하, 규제의 불예측성은 기업 규모를 불문하고 한국 산업생태계 전체를 압박하는 제도적 약점이다. 이 기반을 개선하지 않으면서 대기업을 규제하고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것은 증상을 치료하면서 원인은 방치하는 것과 같다.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은 단순하다.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성과에 따라 보상받으며, 실패하면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정부가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징벌할지를 결정하는 순간 시장의 역동성은 사라진다.
한국경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호 정책이 아닌 경쟁 정책이다. 특정 기업을 보호하거나 특정 규모의 기업을 징벌하는 방식은 산업생태계의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기업의 규모와 무관하게 공정한 경쟁의 규칙이 적용되고, 혁신과 투자가 보상받으며, 비효율적인 기업은 시장의 압력 속에서 스스로 퇴출되는 경쟁 질서를 세우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다. 경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면 새로운 기업이 도전하고 성장하여 대기업이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기존 대기업도 안주할 수 없게 된다.
성장할수록 불이익이 커지는 제도는 기업의 도전 의지를 꺾고, 기업가정신을 말살한다. 한국경제가 다시 활력을 회복하려면 기업 규모에 따른 징벌과 보호의 틀을 걷어내고, 경쟁정책 중심으로 제도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규모와 관계없이 같은 경쟁의 규칙 아래에서 겨루고,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 것이 건강한 시장의 원리다. 더 많은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더 많은 근로자가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경제. 그것은 시장의 경쟁 질서를 신뢰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이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이고, 기업가정신이 살아 숨 쉬는 사회의 조건이다.
필자소개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
최승노는 현재 자유기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객원연구원을 거쳐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자유기업원의 전신인 자유기업센터 창립 멤버로 참여한 이래 기업연구실 실장,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고 2017년부터 현직을 맡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경제학회 회장을 겸하고 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자유시장경제, 기업 규제 개선, 재산권 및 상속세 제도 등이다. 주요 저서로는 『경제자유지수』, 『포퓰리즘의 덫』, 『자본이 어려운 당신에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