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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업의 역설: ‘강제된 배당’보다 ‘지배구조의 신뢰’가 먼저다

글쓴이
이다경 2026-05-27

한국 자본시장의 고질적 저평가,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한 정부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주주환원을 독려하고 공시를 의무화하는 등 다양한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본질적 관점에서 볼 때, 기업 가치는 정부의 지침이나 법적 강제로 ‘교정’되는 대상이 아니다. 자본은 명령이 아닌 수익성과 안전성을 따라 흐르며, 그 흐름을 결정하는 핵심 기제는 기업의 자율적인 ‘지배구조 신뢰’다.

‘대리인 비용’이 갉아먹는 기업의 현금 가치
한국은행의 분석(BOK 이슈노트 **-**-**호)은 매우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주주보호가 취약한 기업일수록 그들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기업가치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는 시장경제학의 고전적 난제인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투자자 입장에서 지배구조가 불투명한 기업의 현금은 ‘미래를 위한 재원’이 아니라,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을 위해 오용되거나 비효율적으로 사장될 ‘리스크’로 인식된다. 즉, 똑같은 1,000억 원이라도 시장이 부여하는 가치는 기업의 지배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시장은 단순히 숫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쓰일 것이라는 ‘신뢰’에 가격을 매기기 때문이다.

시장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밸류업 강제화’의 함정
최근 논의되는 주주환원 강제화나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는 표면적으로는 주주 보호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시장의 자율적 자원 배분 기능을 왜곡할 위험이 크다. 기업마다 처한 산업 주기와 투자 소요는 제각각이다. 한창 설비 투자가 필요한 성장기 기업에 일률적인 배당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시장의 가격 신호를 무시하고 성장의 싹을 자르는 행위다. 자본은 강제할수록 숨어들고, 규제할수록 떠나간다. 정부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깊숙이 개입해 배당 비율을 정해주려 하는 것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보다 관료의 ‘보이는 손’이 더 유능하다고 믿는 오만이다. 진정한 밸류업은 규제가 아닌, 기업이 스스로 주주를 존중하는 것이 ‘이득’이 되는 환경을 조성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인센티브를 통한 시장 생태계의 복원
성공적인 밸류업 사례로 평가받는 일본의 경우, 강제적 징벌보다 시장 친화적 인센티브에 집중했다. 배당소득세 분리과세와 같은 세제 혜택은 기업과 투자자 모두에게 명확한 유인을 제공한다. 시장경제에서 공급자(기업)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법적 처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본 조달 비용의 감소와 주가 상승이라는 구체적인 보상이다. 또한, 한국은행의 분석처럼 주주환원 확대가 주주보호 취약 그룹에서 더 큰 가치 제고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개별 기업의 배당 액수를 감시할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추도록 유도하고 소액주주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는 공정한 ‘운동장’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자본의 논리에 정직한 시장을 위하여
주가는 해당 기업의 경영 방식과 지배구조에 대해 시장 참여자들이 내린 최종적인 판결문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현상은 결국 우리 시장의 신뢰도가 글로벌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시장의 냉정한 평가다. 이제 우리는 ‘결과의 평등’을 강요하는 규제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최적의 자본 배분을 결정하게 두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배구조의 결함은 시장의 감시와 인센티브를 통해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 자본의 논리를 존중하고 시장의 자율성을 회복할 때, 우리 자본시장은 비로소 코리아디스카운트를 넘어 코리아프리미엄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