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규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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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시윤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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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작가의 저서 《정체성의 진화》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그 과정에서 시장경제와 자유의 확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통찰한 저서이다.
일반적으로 고정 불변한 본질을 일컫는 정체성이 진화하는 것은 인류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성장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그런 궤적을 그렸다. 수렵사회에서 농경시대로, 농경시대에서 산업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시대로, 끊임없이 변화된 환경 속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진화해 온 인류의 발자취가 또렷이 남아있다.
한편 이러한 진화를 추동한 핵심 요인에는 시장경제의 확립과 자유주의 확산이 자리하고 있다. 자유로운 거래가 가능한 시장의 탄생은 산출된 재화와 용역의 경쟁 속에서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며, 결국 가장 큰 혁신적 결과물을 세상에 내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인주의 재산권 개념이 확립되고, 이는 근대사회의 전환점이 됐다. 경제 주체 간 교역과 교류의 확대는 소수의 권력자에게 집중됐던 부와 권력의 독점 체제에 균열을 일으켰다. 사유재산의 개념이 확립되며, 개인의 권리를 신장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또한 자본주의의 맹아는 시민적 자유주의 확립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인류가 위험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혁신을 도모하는 것은 시장경제와 자유주의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 나은 상품을 만들기 위한 경쟁은 세상에 혁신을 일으켰고, 풍요로운 인류의 삶을 이끌어 냈다. 기술적 혁신에 저항한 기계파괴 운동, 중앙 당국이 권력을 쥔 전체주의 국가 등장처럼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시장경제와 자유를 향유하며 이 체제가 정체성 진화의 방점을 찍은 체제임을 몸소 경험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장경제와 자유주의 체제가 얼마나 영속할 수 있을지 최근 들어 우려의 목소리도 잦아지고 있다. 사회주의나 파시즘이 사라진 시대이지만, 행정당국의 민간에 대한 개입은 점차적으로 커지고 있고, 복지국가 확대란 명목, 분배정의란 명분에 의거해, 민간 경제에 대한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실정이다. 그리고 어쩌면 정체성의 진화에 종언을 고할지도 모를 위협이 최근에 부상하고 있다. 전무후무한 새로운 도전의 시대가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 서두에 썼던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가 바로 그것이다.
인공지능 시대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충격을 인류에 줄 것이다. 지금껏 인류는 수많은 도구를 발명했지만 인간의 지성을 총체적으로 초월하는 존재는 인공지능이 최초다. 인간의 전유물이던 예술 및 문학 같은 창작활동을 위협하고, 능숙하게 번역하거나, 자료를 해석하며 고난도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간의 지위를 대체하며 인간 존속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공지능을 향한 규제의 목소리를 높이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기술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불안은 과거 러다이트 운동처럼 기술을 거부하는 당국의 움직임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수많은 이익단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직능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우려를 이야기 하며 규제의 가속화를 당국에 더욱 요구하는 실정이다. 문제는 지금껏 시장을 배경으로 자유롭게 경쟁하며 발전한 기술이란 인류의 성공적 진화공식이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며 당국의 높아진 규제 허들로 위협받게 되는 점이다.
《정체성의 진화》에서 가장 눈여겨봤던 지점이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었다. 기술낙관론자답게 저자는 명징하며 거침없게 대답을 던진다. “기술은 물론 문제들을 낳는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더 나은 기술뿐이다. 기계파괴 운동이 아니다.”
저자는 시장의 힘과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이 이끌 결과를 신뢰한다. 과거 기술적 발명품이 등장했을 때, 당국의 개입이 아닌 자율적 시장이 만들어 낸 결과가 혁신을 이끌었듯이, 인공지능 시대에도 결국 자생적 질서가 인류를 또 한 번 진화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이에크와 미제스가 말했듯이, 당국의 계획 경제가 개인에 대한 빈약한 정보 처리에 기반해 잘못된 정책을 수립하면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했던 역사는 더욱 복잡한 인공지능 시대에 훨씬 더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발전의 지체 문제를 넘어, 개인의 자유권을 위협하고, 자율적 거래보다는 당국의 통제 확대란 결과로 접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특히나 인공지능 시대는 이 기술을 사회 전반에 확산해 경쟁력을 제고 하는 형태가 아닌, 소수의 당국과 특권층을 위한 폐쇄적 형태로 전환하고, 개별경제 주체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경우 사회는 더욱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 기술의 시대에 접어들며 고조된 불안은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문제는 두려움이 당국의 규제 확산을 키워 산업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개인의 권리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특정 직능 단체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 전체의 공익을 포기해야 하는 불합리한 결과도 도출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를 예측하면서 삶을 이어간다,’고 말했다. 어떠한 불확실한 기술적 과도기일지라도, 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정체성의 진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방법을 기억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재산은 한 개인의 유기적 부분이고, 재산권은 실질적으로 인권과 동의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시장의 힘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떠한 불확실한 시대도 이겨낼 수 있는 정체성의 진화라는 점을 오롯이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