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공평한 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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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민욱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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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인턴으로 일하는 사무실에서 미국 마켓에 올릴 상세페이지 문구를 붙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베스트셀러'라는 단어를 넣으면 클릭률이 오를 게 분명한데, 엄밀히 따지면 그 제품은 아직 베스트셀러가 아니었다. 결국 그 단어를 지우고 실제 판매 데이터로 문장을 다시 썼는데, 퇴근길에 읽던 이 책에서 그날의 망설임을 설명하는 이름을 발견했다. 스미스가 말한 '공평한 관찰자'였다.
애덤 스미스에 대해 내가 알던 것은 사실상 두 단어, '보이지 않는 손'과 '이기심'뿐이었다. 전공 수업에서 배운 스미스는 각자 제 이익만 좇아도 시장이 알아서 굴러간다고 말한 자유방임의 원조쯤 되는 인물 아니었나. 그런데 32명의 학자들이 복원해 낸 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도덕철학자였고, 그가 평생 붙든 질문도 "어떻게 부유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까웠다.
책의 중심에는 이른바 '애덤 스미스 문제'가 놓여 있다. 공감을 말한 『도덕감정론』과 이기심을 말한 『국부론』이 서로 모순된다는 백 년 넘은 논쟁인데, 저자들은 두 책을 하나의 사상이 가진 양면으로 읽어낸다. 인간은 제 이익을 좇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존재라서,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이기심이 폭주하려 할 때마다 제동을 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장이 허용하는 건 남을 짓밟는 탐욕이 아니라 신뢰를 전제로 한 '절제된 이기심'인 셈이다. 상세페이지 앞에서 느낀 그 불편함은 도덕 교과서가 심어 준 죄책감이 아니라, 250년 전 스코틀랜드 철학자가 먼저 설명해 둔 감각이었다. 타인을 속여 얻는 이익은 평판을 무너뜨려 결국 자신을 시장에서 퇴출시킨다는 그의 경고를, 나는 리뷰 별점과 반품률 숫자로 매일 확인하는 중이다.
밑줄을 제일 많이 그은 건 스미스가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대목이다. 나는 그가 정부 개입 자체를 싫어했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책을 읽어 보니 아니었다. 그가 못 참았던 건 정경유착, 그러니까 특정 세력한테만 돌아가는 특혜와 진입장벽이었다. 국방, 사법, 공공사업, 공교육은 오히려 국가 몫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놨다. 이 대목에서 나는 좀 멈칫했다. 분업 때문에 노동자 정신이 망가질까 봐 지배층 반대를 무릅쓰고 공교육을 늘리자고 했다니, 내가 알던 냉혹한 시장주의자 이미지랑 너무 달랐다. 결국 『국부론』이 겨냥한 자리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노동자였다.
평등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미스가 격차에 무관심할 거라 짐작했는데 틀렸다. 루소는 상업 사회의 격차를 악으로 봤지만, 스미스는 시장이 만드는 격차 자체보다 그 격차 속에서도 가난한 노동자 삶이 봉건 시대보다 나아졌는지를 물었다. 솔직히 나는 여기서 좀 다르게 생각한다. 격차를 줄이는 것과 바닥의 삶을 끌어올리는 것, 둘 다 중요하지 이 둘을 굳이 나눠서 하나를 고르라는 식의 사고는 좀 게으른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날 논쟁이 격차라는 숫자에만 매몰될 때가 많다는 지적만큼은 뼈아프게 다가왔다.
뜻밖에 반가웠던 건 존 보글이 쓴 장이었다. 뱅가드 창립자가 애덤 스미스를 인용해서 오늘날의 주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인데, 그는 경영진과 주주가 단기 이익에만 매달리는 행태를 스미스가 경계한 '신중함 없는 이기심'의 전형이라고 짚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국부론이 나온 지 250년이나 지났는데도 자본주의가 여전히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게 좀 씁쓸했다. 동시에, 그 병의 이름을 스미스가 이미 붙여 놨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사람이 이미 있었다면, 해법도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역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오래 남은 건 역시 그의 무역관이다. 스미스에게 무역은 상대의 것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모든 참가국의 부를 함께 키우는 포지티브섬 게임이었다. 보호무역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요즘 보면 낡은 얘기 같지만, 실제로 국경 너머 고객과 매일 거래하다 보면 이게 낡기는커녕 제일 실용적인 얘기라는 걸 느낀다. 상대 국가의 몫을 뺏어야 내가 이긴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래는 삐걱거린다. 오히려 상대도 이득을 봐야 다음 거래가 이어진다는 걸, 나는 이론이 아니라 매출 그래프로 배우고 있다. 그러니 스미스의 무역관은 나에게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윤리에 가깝다.
책을 덮고 나서 스미스가 꿈꾼 시장이 탐욕의 경기장은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특권 없이 누구나 정당한 이익을 좇되 서로를 기만하지 않는 '품위 있는 사회', 그게 그가 두 권의 책으로 그린 설계도였다. 자본주의의 도덕성이 의심받는 시대라고들 하는데, 회복해야 할 게 시장에 대한 맹신도 냉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각자 마음속에 이미 있는, 다만 무뎌졌을 뿐인 공평한 관찰자를 다시 켜는 일이 아닐까. 나부터도 다음 상세페이지 문구 앞에서, 다음 거래 앞에서 그 관찰자를 다시 불러올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