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E Home

집단소송제의 이면, 규제중첩과 과잉책임

글쓴이

국회와 법무부가 집단소송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소액·다수 피해자의 실질적 구제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의 명분이 타당하다고 해서 설계까지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논의되는 소급적용과 옵트아웃 방식, 기존 규제와의 중첩은 기업에 예측하기 어려운 책임을 부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소급적용이다. 국회에서 논의되는 집단소송법안 가운데에는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사건까지 새로운 집단소송 절차의 적용 대상으로 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기업은 행위 당시의 법과 제도를 기준으로 위험을 계산하고 보험과 충당금을 설정하며 투자와 경영 의사결정을 한다. 사후에 만들어진 소송제도를 과거 사건에 적용한다면 책임 강화의 차원을 넘어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흔들 수 있다.


옵트아웃 방식도 제도의 파급력을 지나치게 키울 수 있다. 소송에서 별도로 제외 의사를 밝히지 않은 피해자까지 자동으로 판결의 효력에 포함되면 개인정보 유출이나 플랫폼 사고처럼 잠재적 피해자가 수십만,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건은 막대한 규모의 소송으로 확대될 수 있다. 피해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구제하는 것과 소송 규모를 자동적으로 극대화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손해배상의 기본은 실제 피해에 상응하는 책임이어야 한다. 기업이 위법행위로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배상을 해야 한다. 다만 개별 피해의 정도나 소송 참여 의사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책임 총액부터 키우는 방식은 피해회복이라는 민사책임의 본래 목적과 거리가 생길 수 있다. 집단소송은 피해자를 돕는 수단이어야지 기업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특히 미국의 집단소송제를 한국에 그대로 대입하는 접근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기업활동의 앞단에서 사전적 행정규제를 촘촘히 쌓기보다 문제가 발생한 뒤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 등 사후적·사법적 통제를 통해 기업의 책임을 묻는 방식이 강하게 발달해 왔다. 집단소송도 이러한 제도적 환경 속에서 시장의 위법행위를 사후적으로 통제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해 왔다.


반면 한국의 규제환경은 다르다. 기업은 사업의 진입과 운영 과정에서 인허가·신고·행위규제·감독·검사 등 다양한 사전규제를 받고 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과징금과 시정명령 등 행정제재가 뒤따르고, 여러 분야에서는 이미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시행되고 있다. 이런 구조에 미국식 집단소송이라는 강한 사후책임 수단까지 추가하면 규제의 공백을 메우기보다 사전규제와 사후제재가 중첩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법무부가 올해 하반기 업무계획에서 소액·다수 피해자를 위한 집단소송제 확대를 공식 추진과제로 제시한 만큼, 제도 하나의 효과만 볼 것이 아니라 전체 규제체계 안에서의 누적 효과를 따져야 한다. 집단소송에 입증부담 완화, 광범위한 증거제출, 징벌적 손해배상, 기존 행정제재까지 동시에 결합할 경우 기업이 부담하는 규제비용과 법적 위험은 단순한 합을 넘어 크게 증폭될 수 있다.


이러한 부담은 대기업보다 중소·중견기업과 혁신기업에 더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충분한 법무조직과 보험, 충당 능력을 갖추지 못한 기업은 최종적인 책임 여부가 확정되기도 전에 막대한 소송비용과 평판 훼손을 감당해야 한다. 위험이 과도하게 커지면 기업은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시도하기보다 법적 위험을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고, 그 결과는 투자·고용·혁신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집단소송제의 목적이 피해구제라면 제도 역시 그 목적에 필요한 수준으로 설계해야 한다. 법 시행 이전 사건에 대한 소급적용은 배제하고, 처음부터 광범위한 옵트아웃 방식을 도입하기보다 당사자의 소송 참여 의사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을 우선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존 징벌적 손해배상과 행정제재 등과의 중복 여부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과 기업에 예측하기 어려운 과잉책임을 지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소비자의 권리는 두텁게 보호해야 하지만 기업이 감당해야 할 법적 책임 역시 명확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국회와 정부는 미국의 강한 사후적 사법통제 수단만 떼어 한국의 촘촘한 사전규제 위에 덧붙이기보다, 우리 규제환경 전체를 놓고 집단소송제의 범위와 강도를 설계해야 한다. 입법의 속도보다 제도의 균형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