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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美軍政)과 이승만과 농지개혁, 우리를 골고루 잘살게 하다

자유경제원 / 2017-02-06 / 조회: 7,598       조선펍
▲ 취임연설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 photo by 조선DB

한국은 소득분배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나라 
 
한국은 소득불평등이나 소득격차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나라다. 한국은 지니계수가 2013년 0.302로, 소득불평등이 심하지 않기로 OECD 국가 가운데 17위(OECD), 2010년의 경우 0.316으로 138개국 가운데 21위다(UNDP). 또 소득 최하위10%에 대한 최상위10%의 점유 크기가 2010년 7.8로, 소득격차가 심하지 않기로 138개국 가운데 24위다(UNDP). 한국의 소득분배는 왜 다른 나라에 비해 그다지 심하지 않을까? 그 이유를 이승만이 시행한 농지개혁에서 찾고자 한다.1)
 
브라질과 필리핀, 토지개혁 실시 못해 소득불평등 심한 나라
 
먼저 브라질과 필리핀 이야기부터 하자. UNDP 통계에 따르면, 브라질은 2013년 지니계수가 0.547로, 소득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또 필리핀은 2013년 지니계수가 0.430으로, 소득불평등이 매우 심한 나라다. 이 두 나라가 이렇게 된 데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지 못했거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가 2004년 8월 당시 잘 나가던 브라질 룰라 대통령과 인터뷰를 했다. 중앙일보 기자가 물었다.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룰라의 대답.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룰라가 한국의 농지개혁을 알고 있다니!
 
필리핀은 200여 년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파리강화조약에 따라 필리핀의 지배권을 1898년 2,00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양도했다.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점령당했다가 1943년 독립을 승인받았고, 1946년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1962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20달러로, 같은 해 87달러의 한국보다 2.5배나 많았다. 필리핀은 일찍 개방되었고, 한 때는 한국보다 잘살았지만 2015년 1인당 국민소득은 기껏 3,513달러(한국 27,524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 이래 수십 개 가문이 전국의 토지를 과점(寡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인구의 약 5%가 전체 국토의 약 95%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소작농으로 살아가고 있고, 소작농들은 소작으로 생산한 곡물의 반을 지주에게 바쳐야 할 정도로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소개하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백년동안, 2016.12)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자유경제원이 9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기획한,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배진영은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추진하여 우리가 골고루 잘살게 된 이유를 명쾌하게 밝혀준다. 배진영의 「농지개혁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를 텍스트로 삼았다.
 
미군정, 2차 대전 끝나자마자 토지개혁 추진하다
 
일본은 1900년대 초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본격적인 수탈을 목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일본은 1912년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조선부동산등기령(朝鮮不動産登記令)’, ‘부동산증명령(不動産證明令)’을 발포(發布)하여 농민 수탈을 강화했다. 농민들은 빠르게 몰락하기 시작하여 대부분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점령지에서 공산혁명 확산을 막으려고 선제적으로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미국의 라데진스키가 ‘토지개혁 전도사’로 나섰다. 그는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러시아혁명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토지개혁이야말로 공산주의를 막는 첩경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맥아더사령부에게 일본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그는 필리핀, 중국 등 동남아에서 ‘토지개혁의 전도사’로 활약했다. 배진영은 “토지개혁은 그 당시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고 썼다. 이어 배진영은 이렇게 썼다.
 
“한국(남한)의 농지개혁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선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흔히들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농지개혁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해방 당시 총경지의 63.4%가 소작지이고, 전(全)농가의 51.6%가 순소작농, 33.5%가 자작 겸 소작농이었다. 전농가의 85%가 소작농이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남한에 들어온 지 한 달쯤 지난 1945년 10월 5일 군정법령 제9호를 반포, 소작료율이 당해 토지생산물의 최고 1/3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경제 관련 제반 긴급조치를 취하는 군정법령 제19호를 공포하면서 “과거 일인(日人)에게 약탈된 토지를 농민에게 반환하는 것, 농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을 공평정대하게 분배하는 것”을 당면 목표 중의 하나라고 천명했다. 이어 미 국무부는 1946년 2월 미군정에 토지개혁을 권고했다.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여 1946년 2월 군정장관 직속으로 ‘토지개혁법안기초위원회’를 설치했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7일 전 일본인 소유 농지를 소작농가에 매각하는 법령 제정 방침을, 이어 3월 15일에는 귀속농지에 대한 불하(拂下)계획을 발표했다. 북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을 단행한 시기 전후에 미군정도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준비에 착수했다는 얘기다.
 
미국, 세계에 시장경제질서를 구축하려 하다
 
미국이 토지개혁에 열심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체제를,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던 데서 찾을 수 있다. 해방 후 미국이 38선 이남에 진주하여 이승만의 주도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대한민국의 항로를 좌우했듯이, 농지개혁 역시 미국의 의지에 영향을 받고 시행되어 대한민국을 골고루 잘사는 나라가 되게 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노예로 길’로 가는 첫 걸음
 
북한의 토지개혁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농지’보다 범위가 큰 ‘토지’를 대상으로 개혁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달콤한 구호 아래 행해졌지만,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토지 소유권이 아니었다. 경작권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게다가 25%에 달하는 고율의 현물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 후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농민들은 경작권마저 빼앗겼다. 북한이 1954년 11월 말부터 농업집단화에 착수, 협동농장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결과는 1990년대 중반 300만 명이 굶어죽는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노예로 길’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미군정의 토지개혁 추진이 갖는 의미
 
미군정은 개혁초안을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상정, 토지개혁법 입법을 촉구했다. 한민당계 지주 출신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입법의원들은 심의조차 거부했다. 미군정은 토지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5·10 총선을 앞둔 1948년 3월 22일 법령 제173호를 반포하여 일제 귀속재산을 소유·관리하기 위해 1946년 3월 3일에 설립한 신한공사를 1948년 3월 22일에 해체하고, 공사 소유 귀속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했다. 미군정의 귀속농지 불하 작업은 결과적으로 정부 수립 후 한국정부에 의한 농지개혁을 앞당기게 한 결정적 배경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농지개혁을 위한 선행 모델까지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런데 미군정이 1948년 5·10 총선을 40여 일 앞둔 시점에서 귀속농지 분배를 강행한 데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첫째, 공산주의자들과 농민 사이를 차단하여 선거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둘째, 정부가 광대한 토지를 소유·관리하면 독재자 출현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아 ‘이승만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제정헌법은 제86조에서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라고 규정했다. 농지개혁은 신생 대한민국의 피할 수 없는 헌법적 과업이 된 것이다.
 
이승만, 농지개혁을 추진하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책임질 초대 농림부 장관에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조봉암을 임명,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기용한 것은 농민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후에 밝혔다.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추진하게 된 동기는 세 가지로 논의된다.
 
첫째, 오랜 기간 동안 양반·지주계급의 착취에 시달려온 ‘가난한’ 소작농들을 경제·사회적 질곡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인도적 동기다. 즉, ‘농지개혁법은 반상(班常) 차별을 없애는 근본적 해결책’으로 본 것이다.
 
둘째,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켜 경제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경제적 동기다. 즉,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셋째, 농지개혁을 단행해 농민들을 앞세운 공산혁명을 예방하는 한편 호남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의 영향력으로부터 농민들을 차단하고, 농민들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정치적 동기다. 즉, ‘공산당을 막으려면 농지개혁을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그런데 세간에는 농지개혁은 조봉암 주도로 추진된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농지개혁 입법을 서둘렀다. 농지개혁법안 논의가 시작되자 주된 쟁점은 분배 대상 토지의 면적, 보상지가(지주들이 받아야 할 땅값), 보상방식과 내용, 상환지가(농민들이 내야 할 땅값), 상환방식과 내용 등이었다. 이를 놓고 농림부안, 기획처안(정부안), 산업위원회안(국회안) 세 가지 안이 마련되었다.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농지개혁법에 따르면, 지주가 받아야 할 땅값인 보상지가와 농민들이 내야 할 땅값인 상환지가가 모두 평년작의 150%로 통일되었다. 개정된 법률은 세 안을 절충한 것이지 조봉암 주도로 작성된 농림부안이 채택된 것은 아니다. 개정안에서 정부 부담은 전혀 없었다.
 
농지개혁, 농지는 농민이 소유하게 하고 ‘농지소유상한제’를 도입하다
 
농지개혁법은 1949년 1월 국무회의에 상정되었고, 같은 해 6월 25일 법 제31호로 공포되었으며, 1950년 3월 개정법안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농지개혁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54년에 끝낼 예정이었던 농지개혁은 10년 이상 지연되어 박정희 정부에서 1969년 4월에야 마무리되었다.
 
이 농지개혁법의 핵심 내용은 정부가 농가 아닌 자의 농지, 자신이 직접 경작하지 않는 농지, 그리고 소유상한을 초과하는 농지를 사들여 이를 직접 경작할 농가에 분배하여 소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농지 분배는 1가구당 3정보(주: 약 9,000평)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3정보 초과 농지는 정부가 매수하도록 하는 등 ‘농지소유상한제’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농지개혁의 가장 큰 의의는 농지가 소수의 지주에게 편중(偏重)되지 않도록 지주의 소유를 농민의 소유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다. 베풂으로 일관한 경주 최 부잣집의 ‘300년간 지속된 부’도 농지개혁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도입한 농지개혁법은 농지 소유의 집중을 억제한 결과 브라질과 필리핀 같은 나라들과는 달리 한국은 골고루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성공한 대한민국 농지개혁의 중심에 있는 한 사람, 이승만’
 
솔직히 말해, 이승만의 농지개혁 배경에 공산주의를 막으려는 미국무부와 미군정의 ‘큰 손’이 있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배진영의 글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필자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텍스트를 제공한 배진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한 북한의 토지개혁을 선(善)으로 보는 386세대, 그 세대의 전교조 교사나 ‘국사업자’들이 쓴 한국사교과서로 배운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웅변한다.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성공이었다고! 농지개혁 덕분에 대한민국은 ‘흙수저가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로 출발할 수 있었다고! 농민이 전체 인구의 70.9%에 달하던 그 시절 농지개혁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이 만들어졌고, 공산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고, 신생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농지개혁이 있었기에 1960∼70년대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식 토지개혁은 농민에 대한 사기극이었고, 300만 명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으로 가는 입구였다고! 아, 여기에 꼭 덧붙여야 할 얘기가 있다. 그 성공한 대한민국 농지개혁의 중심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의 이름은 ‘이승만(李承晩)’이라고!”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묘소 참배도 거부하는 정치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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