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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의 역습①] K-기술 사다리, 왜 스스로 무너졌나

글쓴이
자유기업원 2026-04-29 , EBN 산업경제

한국 산업의 공급망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반도체·자동차·바이오 등 전략 산업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핵심 장비와 원천기술, 배터리 소재, 상업화 역량에서는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대기업의 납품단가 압박과 기술 공동 개발 과정에서 귀속 문제, 핵심 인력 유출 등이 겹치며 산업 생태계의 기반이 약화하고 있다. 결국 일부 대기업의 성과만으로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운 만큼, 기술 보호의 실효성 강화와 함께 공정한 거래 구조 확립 등 생태계 전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미·일·독에 바치는 '천문학적 로열티'


29일 국가통계포털(KOSIS) '기술무역수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4년(최신) 기준 우리나라 기술무역수지는 약 38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기술무역수지는 국가(기업)가 기술을 해외에 팔아 벌어들인 돈과 외국 기술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급한 돈의 차이를 의미한다. 특히 전기·전자 분야에서의 기술무역수지 적자가 크게 나타나며 주력 산업일수록 해외 기술 의존도가 높은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미국과의 격차다. 2024년 대(對)미국 기술무역수지는 34억 3963만 달러(약 5조700억원)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우리가 첨단 제품을 팔아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 부분이 미국산 설계 자산(IP)과 원천 기술료로 빠져나가는 이른바 '기술 깔때기' 현상이 고착화된 것이다.


일본과 독일 등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강국과의 기술무역수지도 처참하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소부장 독립'을 외쳤지만, 2024년 대(對)일본 적자는 5억5403만 달러(약 8100억원), 대(對)독일 적자는 6억2530만 달러(약 9200억원)로 최근 5년 중 최대치를 경신했다. 제품을 만들수록 핵심 장비와 원천 기술을 쥔 국가들에 더 많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자본의 흐름을 보면 위기는 더욱 선명해진다.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 직접투자(FDI)와 우리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대외 직접투자(ODI) 사이의 '질적 불균형'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대외 직접투자(ODI)는 약 718억8000만 달러(약 106조1000억원)로 국내로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FDI·360억5000만 달러·53조2000억원)의 두 배에 달했다. 매년 300억 달러(약 44조원) 이상의 자본이 순유출되고 있다. 특히 첨단 반도체 기술 자본의 미국행은 코로나19 이전 대비 30배 이상 폭증했다.


주목할 점은 유입되는 자본(FDI)의 성격이다. 최근 국내 유입 투자의 70% 이상은 신규 공장을 짓는 '그린필드' 투자가 아닌 기존 설비를 보수하는 '증액 투자'에 쏠려 있다. 반면 해외로 나가는 자본(ODI)은 미래 먹거리를 결정할 최첨단 생산 기지와 연구개발(R&D) 인프라 구축에 집중된다. 국내의 엄격한 규제와 비대칭적 이익 구조를 피해 우리 기술 자본이 '스스로' 해외 망명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부러진 산업 허리, 중견기업 적자 2배 폭증… 중소기업은 'R&D 절벽'


큰 위기는 생태계 내부의 '기술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은 기술 수출을 늘리고 핵심 기술을 내재화하면서 적자 규모를 꾸준히 줄여왔다. 대기업의 기술무역수지 적자는 지난 2020년 21억193만 달러(약 3조1000억원)에서 2024년 13억5892만 달러(약 2조원)로 4년 새 7억4300만 달러(약 1조1000억원·35%) 개선됐다.


2024년 중견기업의 기술무역수지 적자는 24억1013만 달러(약 3조5000억원)로 2020년(12억7050만 달러·1조8000억원) 대비 4년 만에 2배 가까이 폭증했다. 중소기업의 기술무역수지 적자는 2020년 대비 2024년 10배 이상 줄었다. 중소기업의 적자 폭이 줄어든 건 기술 수출이 늘어서가 아니라 해외에서 신기술을 도입할 여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소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미래를 위한 R&D와 선진 기술을 멈췄다는 얘기다.


이 같은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간 기술과 성장의 격차는 '공동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이 최근 공개한 '2025년 중소기업 기술보호 수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기술 유출의 주요 경로로 '사업 협력 및 공동 개발' 과정이 지목됐다. 대기업은 공동 R&D를 조건으로 '특허권 공동 소유'를 요구하는데 이는 중소기업에 치명적인 독이 된다.


공동 특허가 되는 순간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동의 없이도 해당 기술을 자사 라인에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갖게 된다. 사실상 '합법적 기술 탈취'다. 중소기업의 70% 이상은 대기업의 이러한 기술 자료 요구에 대해 '거래 단절'이 두려워 거절조차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이 흘러 나가는 가장 치명적인 통로는 '사람'이다. 소부장 생태계의 허리가 부러지는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전문 인력의 대기업·해외 편중 현상이 지목된다. 실제 기술 침해 사고의 가장 큰 원인(약 80% 이상)은 '퇴직 인력에 의한 유출'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육성한 엔지니어가 대기업이나 경쟁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정 노하우와 핵심 기술이 고스란히 함께 이전되는 구조다.


해외로 향하는 인재들의 발걸음도 거세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두뇌 유출 지수'에서 한국은 여전히 주요국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 산업의 베테랑급 엔지니어들이 중국이나 미국 기업의 '파격적 처우' 제안을 받고 이직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상생' 가면 쓴 합법적 탈취…'공동 특허' 함정에 갇힌 소부장


정부가 야심 차게 도입한 '납품대금 연동제' 역시 현장에서는 허점이 가득하다는 지적이다. KIET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납품대금 연동제 이슈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과 정책적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현행 연동제는 오직 '원자재 가격'에만 매몰돼 있다. 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인건비, 에너지 비용, 물류비 등은 연동 대상에서 제외된다.


문제는 이른바 ‘혁신의 역설’이다. 중소기업이 공정 개선과 기술 혁신으로 원가를 절감하면, 대기업은 이를 근거로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은 일부 반영되더라도 기술의 가치와 혁신에 투입된 노력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중소기업은 기술 개발에 나설 경제적 유인을 잃게 된다는 게 산업계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대기업의 완제품이란 결과물에만 매몰돼 생태계의 뿌리를 방치한다면 우리 산업은 스스로 혁신할 동력을 잃고 해외 기술의 '단순 조립 공장'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과 전략적 접근도 주문했다.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전 지식경제부 R&D 전략기획단 전문위원)은 "국내 산업 정책은 핵심 의제의 연속성과 실행 주체가 부족해 장기 전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공급망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앵커 수요 창출과 전략적 니치(Niche·틈새) 설정, 장기 프로젝트 기반의 일관된 추진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마중물 역할을 하는 수요를 만들어내고 중소·중견기업이 그 틈새에서 장기적으로 기술력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R&D 풍토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고광용 자유기업원 정책실장은 "미국 등 기술 선도국은 실패 경험을 축적한 인력을 중심으로 기술 역량을 강화하는 반면 국내는 실패에 대한 부담이 커 도전적 연구가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고 실장은 이어 "R&D는 단기 성과보다 장기 경쟁력 확보를 위한 실패 허용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