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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무가 사라지는 시대, 시장은 왜 멀쩡한가

글쓴이
강영원 2026-05-27

취업 준비생 커뮤니티에 요즘 이런 글이 올라온다. "서류는 붙었는데 TO가 사라졌어요." 실제로 한국 IT·스타트업 업계의 신입 채용 공고는 2021년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다. 기업들이 AI로 업무를 대체하면서 사람을 뽑을 이유가 줄었기 때문이다.


경력직도 예외가 아니다. KDI 분석에 따르면 AI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직군은 사무직이며, 30~44세 고임금 계층에서 노출도가 특히 높다. 10년을 쌓아온 경력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장에서 값어치를 잃는다. 억울하다.


그런데 여기서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시장은 정말 틀린 걸까.시장경제에서 기업은 같은 결과를 더 낮은 비용으로 얻으려 한다. 이것은 탐욕이 아니라 시장의 작동 원리다. 월급 300만 원짜리 사무 업무를 월 수십만 원의 AI 구독료로 처리할 수 있다면, 기업이 AI를 선택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이다.


미국의 결제기업 Block은 올해 2월 직원 1만 명을 6천 명 미만으로 줄였다. AI 도입이 이유였다. 비난하기 쉽다. 하지만 경쟁사가 AI로 비용을 절감하는 동안 혼자 인건비를 고집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시장의 신호는 냉정하지만, 그 냉정함에는 이유가 있다.문제는 이 신호가 특정 개인의 생계에 직접 꽂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흘러왔는가. ATM이 전국에 보급됐을 때 은행원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실제로는 반대였다. 단순 업무를 기계에 넘긴 은행원들은 상담과 자산관리로 이동했고, 은행 지점 수와 고용은 한동안 오히려 늘었다.


Anthropic이 올해 3월 발표한 연구에서도 AI 영향을 크게 받는 직업군인 프로그래머, 고객 서비스 담당자, 금융 분석가의 전체 실업률은 증가하지 않았다. AI는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의 내용을 바꾼다. 이것이 시장 낙관론의 근거다.


그러나 이 낙관론에는 조건이 붙는다. 개인이 빠르게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AI 관련 재교육 과정 수강료는 수백만 원이고 취업 보장은 없다. KDI는 AI 노출도가 높은 직업군의 고용 비중이 향후 20년간 최대 7%p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20년이다. 지금 45세 직장인에게 "20년 뒤엔 괜찮을 것"이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다. 시장의 판단은 옳을 수 있지만, 그 판단이 집행되는 속도와 개인이 적응하는 속도 사이의 간극은 현실에서 매우 크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AI 도입을 규제하거나 속도를 강제로 늦추는 것은 답이 아니다. 혁신을 틀어막는 나라가 경쟁에서 살아남은 역사는 없다. 진짜 문제는 AI가 아니라, 전환을 가로막는 구조적 경직성이다. 직종 간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자격증 규제, 재교육 시장의 진입 장벽, 연공서열 중심의 고용 관행이 바로 그것이다. 시장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이 장벽들을 걷어내는 것, 개인이 자유롭게 새로운 역할을 찾아갈 수 있는 노동시장을 만드는 것이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해법이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혁신을 막는 규제가 아니라, 혁신에 올라탈 수 있는 자유다.시장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시장이 제 속도로 작동하려면, 그것을 가로막는 규제와 관행부터 걷어내야 한다. AI는 시장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다. 그 신호를 막을 것인가, 올라탈 것인가. 답은 이미 시장경제가 수백 년간 증명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