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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소비자 사이

글쓴이
오현철 2025-12-12

토요일 오전, 대형마트 채소 코너 앞에서 한 주부가 멈춰 섰다. 손에 든 상추 한 봉지를 이리저리 뒤집어 본다. 겉보기엔 싱싱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의문이 가득하다. "이 채소, 농약은 안전할까?"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 앞에서 소비자는 무력하다. 결국 그녀는 조금 더 비싼 '친환경 인증' 마크가 붙은 상추를 집어 들었다. 이 작은 선택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의 경제학이 작동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경기도의 한 상추 재배 농가에서 잔류농약 기준을 초과한 농산물이 적발됐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검사관이 무작위로 채취한 시료였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해당 농산물은 즉시 유통이 중단됐다. 농민은 분노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왜 못 팔게 하나?" 하지만 기준은 명확했다. 0.01mg이라도 초과하면 불합격이다.


이 사건 하나가 전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만약 그 상추가 시장에 풀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장은 문제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 건의 사고가 언론에 보도되는 순간, 소비자는 모든 상추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이 그랬다. 일부 농가의 문제가 전체 계란 시장을 마비시켰다. 가격은 폭락했고, 성실한 농민들까지 피해를 입었다.


경제학은 이를 '레몬마켓'이라 부른다. 중고차 시장에서 불량차(레몬)가 좋은 차를 몰아내듯, 불량 농산물 하나가 양품까지 의심받게 만든다.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이다. 농민은 자기 농산물의 안전성을 안다. 하지만 소비자는 알 방법이 없다. 눈으로 봐서는 농약 잔류량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시장 자체가 작동을 멈춘다.


여기서 공공 검사의 경제적 의미가 드러난다. 검사는 단순히 불량품을 걸러내는 행위가 아니다. 시장에 '신호'를 보내는 일이다. "이 농산물은 검증됐다"는 신호. 'GAP 인증'이나 '친환경 마크'는 그 신호의 가시화다. 소비자는 마크 하나로 안심하고 지갑을 연다. 이 신뢰가 쌓여 시장은 커진다.


신호 이론의 핵심은 비용이다. 거짓 신호를 보내기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농약을 남용한 농민이 친환경 인증을 받기는 어렵다. 엄격한 검사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검증 비용'이 신뢰의 가격이다. 시장은 이 비용을 감당할 의지가 있는 생산자에게만 프리미엄을 준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정부가 개입하면 시장 자율이 훼손되는 거 아닌가?" 자유시장 원리주의자들은 민간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소비자 개개인이 농약 검사를 할 수는 없다. 검사 비용이 너무 크다. 이른바 '거래비용'이 시장 형성 자체를 가로막는다.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공공 검사 시스템이 촘촘하다. 유럽연합은 농약 잔류 허용 기준이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다. 그 덕분에 EU산 농산물은 프리미엄을 받는다. 신뢰가 브랜드가 된 것이다. 반대로 검사 체계가 허술한 곳은 어떤가? 중국산 식품 파동을 떠올려 보라. 멜라민 분유 사건 이후 중국 유제품은 국제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이는 외부효과의 전형이다. 한 기업의 일탈이 전체 산업에 피해를 준다. 시장 자율만으로는 이 외부효과를 통제할 수 없다. 여기서 정부의 최소 개입이 정당화된다. 단, 개입의 목적은 시장을 대체하는 게 아니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신뢰 인프라'를 깔아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시스템은 무엇일까? 검사 결과의 실시간 공개다. 지금은 부적합 판정을 받은 농가 정보가 제한적으로만 공개된다. 하지만 소비자 알권리 차원에서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동시에 민간 인증 기관과 공공 검증 기관이 이중으로 작동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민간의 효율성과 공공의 공정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농부와 소비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극이 있다. 정보의 간극, 신뢰의 간극.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공공 검사의 역할이다. 시장경제는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 위에서 작동한다. 그 신뢰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 아침 전국 곳곳에서 농산물 시료를 채취하고, 잔류농약을 분석하고, 기준을 적용하는 검사관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


검사관의 도장 한 번이 시장 전체를 움직인다. 정부는 시장의 선수가 아니다. 공정한 룰을 만들고 지키는 심판이다. 그 심판이 제대로 서 있을 때, 비로소 농민은 땀 흘린 만큼 대가를 받고, 소비자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신뢰 위에 선 시장, 그것이 진짜 자유시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