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경제학 — 이념의 대립 속에서 시장의 균형을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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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장유찬 202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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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 되면 뉴스 속 인물의 발언보다 그 발언에 대한 SNS 논쟁이 더 뜨겁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당의 이름만 들어도 감정이 먼저 앞선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까?”
경영학을 전공하지만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던 나도, 그 이유가 궁금했고, 공부를 이어가며 깨달은 것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뒤에는 사실 ‘시장경제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가 숨어 있다는 점이었다.
시장은 단순한 ‘자유방임’이 아니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 정보와 기대가 맞물리며 결정되며, 누군가의 소비가 타인의 소득이 되고, 개인의 선택이 모여 사회 전체의 균형을 형성한다. 이런 흐름이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러나 이 손이 언제나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시장은 정보가 불완전하고, 한 사람의 선택이 제3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효과, 그리고 경쟁이 제한된 독과점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가격이 왜곡되고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기 쉽다. 따라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보장하는 제도와 적절한 개입, 그리고 윤리적 기반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율과 조정의 균형 위에서만 시장경제는 살아 숨 쉴 수 있다.
문제는, 경제를 해석하는 언어가 종종 ‘이념의 틀’에 갇힌다는 점이다. 보수는 시장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진보는 공공성과 형평을 중시한다. 그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관점이 충돌할 때, 우리는 너무 쉽게 ‘다름’을 ‘대립’으로 바꿔버린다. 그러나 현실의 이념은 교과서 속 이론처럼 단순하지 않다.
보수도 경기 침체기에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주장하고, 진보 또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 민간의 자율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념은 고정된 신념이 아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며 그 자체로 시장경제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구조와 현재의 현실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이념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정책의 타당성’에 대해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경제학은 어느 한쪽의 손만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 시장은 앞서 언급한 정보의 비대칭·외부효과·독과점 같은 한계를 지니고, 정부 또한 비효율·정치적 개입·규제 과잉의 실패를 마주하곤 한다. 결국 시장과 정부는 서로의 결함을 보완하며 균형을 회복하는 관계다. 한쪽이 과도할 때 다른 한쪽이 이를 조정하는 구조, 그것이 시장경제의 본질이다.
SNS에서는 이런 균형의 논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규제 완화’는 대기업 특혜로, ‘복지 확대’는 세금 낭비로 단정되곤 한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언어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규제 완화는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을 개선하는 신호가 될 수 있고, 복지 확대는 소비와 노동 참여를 높이는 유효수요 정책이 될 수 있다. 정치가 단어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동안, 경제학은 그 단어의 구조를 차분히 해부한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누가 옳은가’보다 ‘이 상황에서 어느 쪽이 효율적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세대의 정치 피로감은 어쩌면 경제학의 시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옳고 그름의 언어가 아니라, 제한된 자원 속에서 효용을 극대화하는 선택의 언어다. 시장경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된다면, 논쟁은 공격이 아닌 설계이자 보완의 첫걸음이 된다.
최저임금, 부동산, 청년 일자리 문제도 이념의 전장이 아니라 구조적 인센티브 설계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다.
시장의 논리는 흑백이 아니다. 효율성과 형평, 성장과 분배는 늘 교차하며 균형점을 찾아간다.
이념을 극단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 회색 지대의 존재를 인정할 때 곧 건강한 대화와 서로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단단해진다. 자유와 공공성, 경쟁과 책임 사이의 균형을 이해해야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는다.
시장의 언어로 대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같은 사회를 바라볼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하는 사회의 출발점은, 결국 시장경제의 원리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