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기초예술은 문화산업 ‘기초’가 되므로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이문원 / 2019-11-15 / 조회: 8,284

지난 8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2020년 정부예산기금 운용계획 중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이 사상 처음 6조 원을 넘어섰다. 2019년보다 5,525억 원, 약 9.3% 증가한 수치다. 그런데 그 늘어난 예산 명목 중 특이한 용어가 보인다. '기초예술’이란 용어다.


'기초예술 창작환경 조성’ 명목으로 책정된 예산은 전년도 대비 2배 이상 늘어났다. 내용을 보면, 먼저 '예술인 창작준비금’(1인당 연간 300만 원) 지원대상이 1만 2,000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올해 대상자 1,170명을 목표로 시범 운영된 생활안정자금 융자도 2,370명으로 2배 이상 확대됐다. 창작 공간 포함 전세 및 월세 주택자금상품 역시 기초예술인들에 한해 대출한도 상한액을 4,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인상한다. 이 모든 예산들이 '기초예술’이란 낯선 용어를 통해 전년도 배 이상 규모로 편성된 것이다.


그럼 이 '기초예술’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용어일까. 사실 단순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 오래 전 등장한 용어다. 2004년 대학미술협의회에서 발간된 '대학미술교육과 21세기 사회’에 그 탄생을 알리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순수예술이 위축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에 따라 지난 4월에는 순수예술로 분류되던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전통예술 등의 장르가 순수예술이라는 단어를 던져 버리고 기초예술이라는 단어로 통일하면서 기초예술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기초예술연대’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흔히 사용하던 '순수예술’이란 용어를 대체한 것뿐이란 얘기다. 각종 미디어 기사들을 통해 살펴보면 대략 2012~2013년경부터 순수예술을 '기초예술’로 바꿔 부르는 분위기가 정착됐음을 알 수 있다. 2004년에 외쳤던 '전략’이 먹혀 들어가는 데 그 정도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럼 애초 왜 기초예술로 대체하려 한 걸까.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하나씩 살펴보자.


애초 '순수예술’부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프레임이었다


일단 '기초예술’과 사실상 같지만 전략적으로 버려진 용어, '순수예술’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부터 살펴보자. 위 대학미술협의회 책자 내용처럼 일반적으로 순수예술에 들어가는 장르로는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전통예술 등을 꼽는다. 물론 여기서 '순수예술로서의 문학’에 '해리 포터’ 같은 것이 들어가는 건 아니고, 마찬가지로 '순수예술로서의 음악’에 방탄소년단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저 '순수예술’을 영어론 Fine Art라 번역한다. '순수’라면 자연스럽게 Pure Art라 해야 할 텐데, 정작 Pure Art는 추상미술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런데 사실 Fine Art도 영어사용권에서 의미는 위 순수예술 개념과 거리가 있다. 실질적으로 '고급예술’ 정도 의미다. 근래 식도락 붐과 함께 자주 사용되는 단어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이 '순수식당’이 아니라 '고급식당’이란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영어사용권에서 Fine Art에 대립되는 개념은 Applied Art, 즉 '응용미술’이다. 별 게 아니라, 실용적 목적을 띤 공예나 장식미술 등을 가리키던 용어다. 현대에 와선 같은 개념이 '디자인’, '디자이너’ 등으로 정착됐다. Fine Art는 그저 '그런 것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던 개념이다. 거기다 지금 Fine Art란 용어는 순수예술처럼 장르 구분으로 가둬놓지도 않는다. 영화도 포함되고, 현대음악 형태도 포함된다.


그럼 Fine Art라 번역은 하지만 실제 Fine Art와는 별 상관없는 순수예술이란 정확히 어떤 개념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 시장에서 주류가 아닌 예술형태 정도를 가리킨다. '비인기종목’, 아니 '비인기 장르 또는 형식’ 정도로 보면 되겠다. 비인기예술, 혹은 고전예술. 그뿐이다. 물론 이 장르들도 당대에는 지금 '해리 포터’나 방탄소년단처럼 잘 나가는 아이템들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저 고급예술이 어쩌다 순수예술이 됐나. 알고 보면 유치한 얘기다. 해당 장르들이 시대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도태됐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시장과 관계없이 유지돼야만 한다’는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이러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것이다. 그럼 그 반대인 안 순수한 건? 시장에서 먹히는 것, 자본주의 체계에 적응한 것, 소위 '팔리는 것’. 그렇게 반자본주의 도그마에 기대 자본주의 대척점에 선 기제로서 만들어진 게 바로 순수예술 용어였단 얘기.


그리고 그 진정한 목적은, 자본주의 체제 내 생존방식에 반기를 든 만큼, 이 장르(혹은 형식)들은 시장에서 승부를 볼 게 아니라 공적개념 등에서 지원해주거나 자본가들이 세금조로 먹여살려줘야 한다는 사고를 정착시키기 위함이다. 순수하지 않은 건 나쁜 것이고 순수한 건 좋은 것인데, 순수한 게 사라지고 그렇지 않은 것만 살아남는다면 그건 '사회정의’가 아니라는 것. 선과 악의 신화적 대립구도를 적용해버린 셈이다.


그럼 '기초예술’은? 저 순수예술이 부르짖던 사고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자 등장한 궁여지책 격 프레임에 불과하다. 예술에 대해 시장논리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품위 없고 추잡하다고 항변하며 예술본위적 순수성을 부르짖을 수 있었던 시대가 이미 지나버린 탓이다. 즉 순수예술의 본모습이 '그저 비인기종목일 뿐’이란 점이 드러나자 여기서부턴 전략을 바꿔버린 셈이다.


'기초예술’은 '순수예술’에서 공적개념 지원 명분을 강화한 프레임일 뿐


'기초’. 사실 대단한 개념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시장에서 잘 나가는 영화나 K팝 등 각종 대중문화 장르들, 그러니까 시대와 환경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류가 된 장르들 '기초’가 되는 게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전통예술 등이란 얘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잘 나가는 장르들을 낳게 한 '기초’가 바로 저 비인기장르들이므로 현재 인기장르들의 성공엔 비인기장르들 '지분’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적개념으로부터의 지원도 당연하며, 나아가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지금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영화도 K팝도 곧 무너질 것이고, 앞으로 '기생충’도 방탄소년단도 나올 수 없다는 협박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주장을 여기저기서 대놓고들 한다.


“연극은 기초예술”이라는 박철민은 “영화나 방송이 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면, 연극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초가 튼튼해야 제반 예술이 발전합니다. 정책적으로 산업이 메우지 못하는 기초예술의 틈이 지원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집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아주경제 2015년 6월23일자 기사 '박철민, 김운하·판영진 사망 소식에 “기초예술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뒷받침이 제고되길”’ 중)


당연히 말이 안 된다. 한국연극이 저 정도 발언이 나올 만큼 세계적 수준과 권위가 있어 한국영화가 세계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래서 한국TV드라마가 급속도로 해외수출실적이 올라간 게 아니다. 개념 자체야 그 기초가 된다는 발상이 이상한 게 아니지만, 이게 상품화된 장르로 넘어갔을 땐 전혀 다른 얘기다. 영화의 기초는 연극이나 문학이 아니게 됐다. 애초 교육과정부터가 이젠 다 따로 성립되고 있다. 실용음악과가 따로 있고, 시나리오학과도 따로 있다. 영화세트를 디자인하는 무대미술 전공까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리고 저 기초예술 육성만이 대중예술 부흥을 이룰 수 있단 발상은 산업화와 분업화, 글로벌화 단계로 가고 있는 문화산업 현실과도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현재 K팝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미 음악 자체는 북유럽 등 해외 작곡가들 손에서 만들어지는 게 많다. 안무도 미국, 일본 등 전 세계 안무가들에 의뢰한다. 그밖에 뮤직비디오나 의상 등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이 모든 것을 '패키징’하고 '마케팅’하는 헤드쿼터 역할을 할 뿐이다. 그걸 K팝이라 부른다. 점차 TV드라마도 해외합작 등을 통해 비슷한 경로를 걷는 중이고, 곧 영화 등 여타 장르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럼 저 '헤드쿼터’ 역할조차 기초예술 기반이 없으면 제대로 못할 것이란 얘기가 되나. 아니면 그때부턴 '한국 내에서 한국 인력들로만 산업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는 식 민족주의적 '엔터테인먼트 주권’이라도 주장한 텐가. 물론 국내에서도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국내에서 이런저런 인력 및 콘텐츠 수급이 가능해지면 편리성이 높아지겠지만, 그 편리성을 위해 '없는 시장’을 두고 세금을 투입시킬 필요까진 또 없는 것이다.


결국 '기초예술’도 '순수예술’만큼이나 허랑하기 짝이 없는 개념에 불과할 따름이다. 아마 '기초과학이 중요하다’는 식 시사이슈에서 영감(?)을 얻어 발굴한 개념 같은데, 본래 예술 흐름이란 인류 진화과정이나 매한가지다. 어느 한 장르가 잘 나가다 도태되고 또 새로운 장르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도태되는 장르에 모여 있던 인재들이 자리를 옮기며 생존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런 식으로 지금껏 자연스럽게 도태돼온 모든 트렌드에 대해, 학술적 목적이 아닌 이상, 그에 세금으로 지원해가며 어떻게든 사멸을 막아야 할 이유는 사실상 없다.


'순수’ '기초’ '다양성’이 아니라 그저 '종속’의 구조


'기초예술’식 주장들을 하는 쪽이 근본적으로 좌익정치진영, 혹은 좌익정치진영과 '맞닿은’ 쪽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좌익정치진영, 특히 한국의 좌익정치진영엔 수십 년째 지속돼온 일관된 전략이 있다. 어찌됐건 뭔가를 주장하다 안 풀리면 그 다음엔 '언어 프레임’을 바꿔 새로운 포지셔닝으로 빈틈을 찾아 치고 들어온단 점이다.


'고급’에서 '순수’로, '순수’에서 다시 '기초’로. 당연히 그 외에도 많다. '좌익’은 '진보’로, '좌익 성향 시민’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민중민주’는 '사람이 먼저다’로. 다른 테크닉도 많다. 결과의 참패는 '진정성’이란 단어로 물타기 하며 넘어가고, '세력화’란 단어가 패거리주의를 연상시키니 이젠 또 '힘화’라는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단어를 들고 온다.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는 흔한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대신에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언제나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중략) 프레임에 대해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 하나는 기억하라. '일단 내 프레임이 논의에 받아들여지면,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냥 상식이 된다.’ 왜? 이미 받아들여진 진부한 프레임 안에서 사고하는 것이 바로 상식이기 때문이다.”(조지 레이코프 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중)


그리고 아마 곧 '기초’도 버려질 것이다. 이미 현재 한국문화를 전 세계에 가장 활발하게 알리고 있는 분야, 실질적 수익까지 내주며 국가경제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 분야들 성공과 저 기초예술 장르들 현황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음이 드러나고 있어서다. 기초예술 지원은 늘 부족하다고 항변하며 꾸준히 규모를 늘려왔는데, 그 '열악했다던 과거’에 생성된 시스템으로 한국은 방탄소년단과 슈퍼엠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고, '기생충’으로 세계 최고 권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프랑스나 미국 등 그간 한국영화가 닿지 않았던 범위에서 흥행까지 성공하고 있다. 최소한 '기초’란 개념을 통해 얻어냈던 명분은 휘발단계가 맞다.


그럼 과연 다음 프레임은 뭐가 될까. 아마도 '다양성 예술’ 정도가 아닐까. 다양한 방향 콘텐츠가 존재하는 시장이야말로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시장이란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데 '다양성’을 과연 공적개념 지원으로 이룬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길까. 엄연히 대중의 '수요’가 있다면 바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다양성’ 차원일 텐데 말이다. 결국 다시 논의는 되돌아올 것이다. '수요가 없어도 다양성은 무조건 확보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말장난 놀음보다도 훨씬 끔찍한 건 그와 같은 사고의 근간이 되는 반자유 반시장적 프레임의 문제다.


“17세기 미술시장이 가장 활기를 띄었던 곳은 네덜란드이다.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의류, 목재, 소금, 와인, 꽃을 수출하며 곡물거래나 조선업, 증권거래, 출판, 어업 등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중략) 미술시장은 상업화,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선계약 후작품 제작을 하거나 소수의 후원자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 이러한 근대사회의 성장은 예술생산이 예술가의 주관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미술가는 기술자인 장인에서 전문직업인으로 상승하여 예술가 대접을 받게 되었다.” (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 자유주의예술포럼 발제문 '시장경제로 본 예술' 중)


지금 좌익진영은 정확히 저 17세기 이전 네덜란드 권문세족이 되고자 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의 작품들, 자신들과 밀접한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형태가 된단 얘기다. 예컨대 지금은 피터 셰퍼 희곡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대사가 어울리는 상황이다.


“'피가로의 결혼’을 보다 황제가 한 번밖에 하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황제가 3번 하품하면 그 오페라는 그날 바로 문을 닫아. 두 번 하품하면 일주일 정도 상연되는데, 한 번 하품하면 그래도 9번은 상연할 수 있거든.”


여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순수’나 '기초’, '다양성’이 아니라, 그저 '종속’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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