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합병가액을 시장이 아닌 '공정가액’으로 강제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을 추진하는 당정의 움직임은 소액주주 보호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자율성과 기업의 구조조정 유연성을 심각하게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
당정은 자산·수익·미래가치를 반영한 새로운 가치평가 모델을 법률로 고정하면 불공정한 저가 합병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가격 형성의 본질을 오해한 접근이다. 가격은 시장에서 수많은 참여자의 정보와 기대가 반영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지, 정부가 일률적 공식으로 정하는 값이 될 수 없다.
자본시장의 신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정가액이라는 개념은 표면적으로 객관성을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복합적 가치 판단이다. 자산가치, 수익가치, 미래가치를 어느 비중으로 반영할지, 어떤 변수들을 어떤 방식으로 할인할지 등에 정답은 없다.
이런 불확실한 판단 기준을 법률로 의무화할 경우 기업은 평가 과정마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고, 평가 결과에 대한 법적 책임까지 떠안게 된다. 시장의 판단 대신 규제기관의 기준이 앞세워질 때 자본시장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특히 최근 도입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와 결합할 경우, 공정가액 제도는 기업의 합병·분할 의사결정을 사실상 사후적으로 규율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충실의무는 원래 위법행위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지만, 현재 흐름은 경영판단의 상당 부분을 사후적으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 합병가액 산정의 적정성까지 추가된다면, 기업은 절차를 준수해도 다시 한 번 법적 검증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형식상 합병이 허용되더라도 실제로는 리스크를 우려해 추진하지 못하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M&A 활동 위축, 구조조정 지연, 산업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기업이 중복사업을 정리하거나 계열사 통합 시 의사결정 속도는 경쟁력의 핵심요소다. 그러나 공정가액 의무화와 외부평가·의견서 공시 등 절차가 도입되면 정상적인 합병조차 불필요한 심사에 막힐 수밖에 없다.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법률이 정한 '적정성’이라는 추상적 기준은 기업을 느리게 만들고, 그 피해는 결국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돌아간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규제들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고착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낮게 평가하는 이유는 단순히 투명성 부족 때문만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규제 도입, 정부가 기업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관행, 법제도의 일관성 부족 등이 한국 시장의 위험요인을 높여 왔다. 공정가액 의무화와 같은 가격 규제적 접근은 자본시장이 이미 갖고 있는 구조적 신뢰 문제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 시장의 신뢰는 규제의 양이 아니라 규제의 예측가능성과 자율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결국 주주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명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시장의 가격을 정부가 대신 정해주는 순간 그 피해는 곧바로 투자자에게 돌아간다. 주식의 가치는 정부가 정한 공식이 아닌, 시장 참여자들의 기대와 정보가 반영된 결과다. 그 자연스러운 과정이 훼손되면 가격 신호는 왜곡되고, 기업은 비효율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주주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규제가 오히려 주주 가치를 떨어뜨리는 역설을 초래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가격 통제가 아니라, 기업과 투자자가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정보투명성을 제고하고, 불필요한 규제 최소화 및 예측가능한 제도적 환경의 조성에 있다. 시장의 자율성과 경쟁이 보장될 때 소액주주 보호도, 기업의 혁신도, 자본시장 신뢰도 함께 강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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