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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의 창조적 파괴

글쓴이
한승지 2025-12-12

1장 서론 : 편리함의 그림자와 골목상권의 불안


집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면 예전과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계산대에는 직원 대신 키오스크가 서 있고, 셀프 계산대가 자리 잡은 매장이 늘어났다. 진열대에는 유명 브랜드보다 “ONLY ○○편의점” 같은 문구가 붙은 PB 상품이 점점 많아진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24시간 문이 열려 있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니 확실히 편리하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그 편리함의 이면에서 동네슈퍼와 소형 마트, 중소 제조업체의 한숨도 함께 커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을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새로운 생산방식과 상품이 등장하면 이전의 방식과 기업은 경쟁에서 밀리고, 이 파괴의 과정이 다시 혁신과 성장을 낳는다는 것이다. 무인편의점과 PB 상품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이 개념을 현재 한국의 골목상권이라는 구체적인 무대 위에 올려놓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그 변화를 단순히 “좋다 또는 나쁘다”로 재단하기보다, 어떤 규칙 아래에서 허용될 때 지역경제 전체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장 본론 : 무인점포와 PB가 만들어낸 새로운 경쟁 구도


무인편의점의 경제 논리는 비교적 분명하다. 편의점 가맹점주에게 가장 큰 부담은 인건비와 임대료다. 야간이나 새벽처럼 손님이 적은 시간대에는 직원 인건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불만이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무인점포 모델은 이 시간대에 인력을 최소화하거나 없애고, 대신 기계, 센서, CCTV에 맡겨 영업을 지속하게 해준다. 그 결과 소비자는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동네 인프라”를 확보하고, 기업과 점주는 비용을 줄인다. 최근 한국 유통업계 분석에 따르면 대형 편의점 체인들이 무인형 점포와 셀프 결제 비중을 빠르게 늘리며 수익성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PB 상품의 확산은 유통 구조를 더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PB는 유통사가 직접 기획하고 상표를 붙여 생산하는 상품으로, 중간 유통 마진과 브랜드 광고비를 줄이는 대신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다. 한국 사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PB 확대는 대형 유통사 입장에서는 마진과 가격 경쟁력을 동시에 높여 주지만, 기존 제조업체와 중소 브랜드에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대형 편의점들은 PB를 ‘싸구려 대체재’가 아니라 전략적 핵심 상품으로 키우고 있으며, 일부 업체에서는 PB 매출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고 전체 매출 비중도 빠르게 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풍경은 더 복잡하다. 선택지는 늘고 가격은 내려가니 당장은 이득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열 공간과 프로모션 권한을 쥐고 있는 유통사가 PB에 유리한 방향으로 매대를 구성하면, 중소 브랜드나 지역 소규모 생산자의 상품은 소비자의 눈에 띄기조차 어려워진다. PB가 일정 수준 이상 커지면 유통사가 사실상의 ‘갑’이 되어 제조업체와의 단가 협상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이는 장기적으로 제품 다양성과 혁신을 줄일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처럼 무인점포와 PB는 한편으로는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전형이다. 더 효율적인 생산 방식과 새로운 상품 구조가 등장해 소비자 후생을 끌어올리고, 자본주의가 가진 역동성을 보여준다(Schumpeter, 194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상권 붕괴, 일자리 감소, 중소 제조업의 협상력 약화라는 비용을 수반한다. 문제는 이 변화 자체를 막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제도와 규칙을 붙여야 창조적 파괴의 이익은 살리면서 피해는 줄일 수 있는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방향이 중요하다.


첫째, PB 상품과 납품 계약 구조를 일정 부분 표준화해 유통사가 중소 제조업체에 과도한 조건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정거래 규칙이 필요하다. 둘째, 편의점 본사와 지자체가 협력해 지역 농산물·특산품을 활용한 “지역 공공 PB”를 개발하면, 편의점 채널이 단순한 대기업 유통망을 넘어 지역 브랜드를 키우는 통로로 작동할 수 있다. 셋째, 무인점포 확산으로 영향을 받는 청년과 중장년층에 대해 디지털, 물류, 서비스 직무로의 전환 교육과 연계된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도 창조적 파괴를 보다 부드럽게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넷째, 편의점 매출과 유동인구 데이터를 지자체와 공유해 상권 과밀과 공백 지역을 함께 진단하고, 골목상권 지원과 입지 조정 정책을 데이터 기반으로 설계하는 시도도 필요하다.


3장 결론 : 창조적 파괴를 지역과 함께 운영


무인편의점과 PB 상품은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흐름이다. 그렇다면 정책의 질문은 “이 변화를 허용할 것인가,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 아래에서 허용할 것인가”로 옮겨가야 한다. 창조적 파괴는 본질적으로 기존 사업자에게 고통을 주는 과정이지만, 그 고통을 온전히 개별 점포와 노동자에게 떠맡길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일정 부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도록 도울 것인지는 제도 설계의 영역이다. 지금까지 주장한 내용처럼 무인점포와 PB는 소비자에게 편리함과 가격 혜택을 제공하는 동시에, 지역 상권과 중소 제조업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혁신을 억누르는 규제가 아니라, 공정한 거래 규칙과 지역 상생 전략, 노동 전환 지원, 데이터 기반 상권 정책을 결합해 창조적 파괴를 “지역경제 업그레이드”로 연결하는 일이다. 그렇게 될 때 편의점의 변화는 누군가의 몰락이 아니라, 지역 경제 구조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