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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경제라는 거대한 실험

글쓴이
류한석 2025-12-12

시장경제의 가장 원초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보여주는 실험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바로 '크리에이터 경제(Creator Economy)'다. 혹자는 이것이 사회를 파편화하고 지성의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이 혼란스럽고, 때로는 저급하며, 예측 불가능한 생태계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 즉 ‘시장경제’가 가장 순수하고 적나라한 형태로 발현된 모습이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25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아이폰을 손에 쥐고 나타난 것과 같다.


과거를 돌이켜보자. 한 사람이 작가나 음악가, 혹은 저널리스트가 되기를 꿈꿨다고 가정해 보자. 재능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다. 출판사 편집장, 음반사 프로듀서, 방송국 편성 책임자. 이들은 대중에게 무엇이 '가치 있는' 콘텐츠인지를 결정하는 소수의 게이트키퍼였다. 이들의 승인 없이, 창작물은 지하실이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을 운명이었다. 이는 경제학적으로 극심한 비효율 상태였다. 높은 진입 장벽, 제한된 공급, 소수 공급자가 시장을 지배하는 과점 체제. 소비자는 그들이 '골라주는' 몇 가지 선택지 안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은 이 견고한 성벽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플랫폼은 개인이 전 세계를 상대로 자신의 콘텐츠를 송출할 수 있는 방송국을 무료로 제공했다. 수십 년간 미디어 산업을 지배해 온 거대 기업들이 지금 이 순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경쟁 방송사나 신문사가 아니라, 자신의 침실에서 노트북 하나로 전 세계 팬들과 소통하는 1인 크리에이터들이다. 이 현상의 핵심에는 시장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이 그 어떤 때보다 순수하고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첫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과거에는 대중 시장을 만족시킬 소수의 콘텐츠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의 모든 ‘틈새’가 하나의 시장이 된다. 빈티지 신시사이저 유튜버를 생각해 보자. 전 세계에 그런 희귀한 취미를 가진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소수'가 인터넷을 통해 한곳에 모이면, 한 명의 창작자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충분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된다. 시장은 이제 수백만 개의 미세 시장(Micro-market)으로 분화하고, 그곳에서 무수한 공급(크리에이터)과 수요(팬)가 직접 만난다.


둘째, ‘가격 결정 메커니즘’이 투명하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크리에이터는 자신의 콘텐츠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매기고, 시장은 구독, 후원, 조회 수라는 형태로 즉각적인 피드백을 보낸다. 실패한 크리에이터는 도태되고, 시장의 인정을 받은 크리에이터는 더 큰 보상을 받는다. 이는 다윈주의적일 만큼 냉혹하지만,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 방식이다. 소비자의 만족이 곧 창작자의 생존과 직결되는, 지극히 시장 친화적인 생태계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시장에서 더욱 흥미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 네이버웹툰이나 카카오페이지에서 활동하는 웹툰 작가들은 이미 글로벌 팬덤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1인 기업가다. 그들의 작품은 국경을 넘어 드라마와 영화로 재창조되며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기괴하지만 독창적인 포맷으로 세계를 휩쓴 '먹방' 유튜버들 역시 마찬가지다. 누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겠는가? 시장은 우리의 상상력을 언제나 뛰어넘는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오직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산업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시장이 유토피아인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자극적인 콘텐츠 생산에만 매몰될 위험, 소수 상위 크리에이터에게 부가 집중되는 '승자독식' 현상, 안정적인 소득 구조의 부재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하지만 이는 시장이 스스로 조정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장통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독점적인 권력으로 시장의 흐름을 막거나 왜곡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크리에이터 경제는 우리에게 시장경제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시장은 단순히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차가운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창의성과 열정이 기술이라는 날개를 달고, 소비자의 인정을 통해 가치로 전환되는 역동적인 무대다. 정부의 규제나 거대 기업의 통제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선택과 경쟁이 어떻게 새로운 부와 기회를 창출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래의 가장 위대한 기업은 최고의 인재를 '고용하는' 회사가 아니라, 최고의 인재들에게 '놀이터를 제공하는' 플랫폼이 될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제 키보드와 마우스를 통해, 세상의 모든 창작자와 소비자의 심장을 직접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앞에서, 우리는 모두 목격자이자 참여자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펼쳐지는 가장 흥미진진한 경제 실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