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 니체가 남긴 명언록의 한 문장이지만 전통적인 의학적 관점에서 면역(immunity)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아니, 현대 면역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노출과 면역력은 비례한다.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문제점은 크게 두가지 논점으로 모아진다. 한 가지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렇게 온 사회 구성원 전체가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마스크를 매일 매시간 써야 할 만큼 생명에 치명적인가, 즉 인간의 면역 능력을 벗어나는가 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지금 하고 있는 방역이 (특히 장기적으로) 과연 효과적인가라는 점이다.
이 두 논점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결국 사회적으로 '개인들에게 지금껏 강요되어온, 그리고 지금도 강요되고 있는 방역체계가 감당해야할 가치가 정말로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지면 관계 상 나는 여타 산업에 미친 코로나 사태의 경제적 후유증 등은 제외하고, 순전히 의학적인 영역에만 한정하여, 특히 면역의 차원에서 본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의 병독성, 의학통계의 편향성, 감염의 본질, 분절적이고 근시안적인 보건의학적 접근의 한계성 등에 초점을 두고 논하고자 한다.
오스트리아 경제학파 시각을 가진 의학사(history of medicine) 전공 연구자의 관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위 질문에 내 이성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결론은 '지금의 방역체계는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조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된 원인은 방역과 건강에 관한 기본 철학에 있어서 위험성과 비용에 대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1년동안 자행되어온 주류 언론과 정부의 선동에 대항해서 조용히 나의 이견을 피력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선동의 진정한 동력은 언론과 정부는 아니었다. 이들 언론과 정부는 자신들의 사회적 신념을 바탕으로 나팔수 역할을 해왔을 뿐이고, 이 코로나 19 패닉이라고 명명할 만한 대중 선동의 근본적 동력, 즉 본질은 바로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편향된 전문가적 시각의 기묘한 조합이다.
사회적으로도 코로나 방역을 놓고 잘하고 있네, 정치방역이네 하며 정치적 좌우 진영 간에 상호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 가고 있지만, 코로나 19 방역의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즉 방역의 효과성과 관련된 논의는 부재하다.
이 세상에 코로나 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질환은 넘쳐난다. 굳이 질병이 아니더라도 도로 위를 굴러가는 자동차도 코로나 보다 몇배는 더 위험하다. 농담이 아니라 한 해 자동차에 의한 보행자 사망자 통계 수치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아무도 자동차 운행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유류세 상승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왜냐면 대다수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고 자동차를 못타고 다니게 만드는 그러한 정책들은 이 대다수의 '국민’을 불편하게 만들테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마스크를 매일 계속 쓰는 것에 대해선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아마도 마스크를 쓰고 숨을 자연스럽게 쉬지 못하고 사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개인의 건강에 심각한 비용(cost)을 초래할 수 있음에 무신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심이 비이성적으로 심화, 확산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평소 '아프면 병원 가고 약 먹으면 돼’라는 신조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부에 더 강력한 방역 조치를 요구하기 마련인 반면, '내 몸과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라는 개인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사적 영역에 심하게 개입해오는 정부의 방역조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한국 사회에선 후자, 즉 개인주의자들의 비율이 영미 사회보다는 절대적으로 낮은 탓인지 강도 높은 방역조치에 대해서도 불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프면 꼭 병원에 가고 약을 먹어야 하는가?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즉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금의 고통을 초래할 만큼 과연 그렇게 치명적인 질병인가? 의학계 내부의 의견은 분분하다. 분명 면역(immunity)이나 신체 항상성(homeostasis)에 관심이 많은 의학자들은 코로나 확산의 초기부터 코로나와 독감 바이러스 간의 차이를 크게 보지 않는 편이다. 반면, 감염내과 혹은 보건학계의 학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사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차이 역시도 도식적인 일반화일 뿐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의학자들의 견해는 모두 다르며 꽤 상반된 시각들이 전문가 집단 내부에 존재한다. 하지만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주류 의학 저널들에 채택되는 논문은 대개 후자의 입장, 즉 코로나 바이러스는 독감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치명률이 높다는 입장에 서 있다. 주류 저널의 편집자들과 학계의 주류 시각이 그런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 시점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과학 이론이 진실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 개인적으로는 작년 해외 의학저널의 논문을 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체내 반응에 있어서 서양인과 동아시아인 간의 차이가 독감과 코로나 간의 차이보다도 더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 의료계의 권위자들과 주류 의학계는 과연 정치적으로 중립적일까? 특히 작년 한 해 반트럼프적 정치 시각을 공유하는 미국 의료계의 주류 의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무능을 증명할 수 있는 코로나 확진자 및 사망자 수 통계에 자신들의 권한과 지식을 총동원한 듯 보인다.
통계학자들은 안다. 통계의 위험성을. 의학적 보건학적 통계는 안그럴까? 코로나 19는 실제로는 작년 내내 치사율 통계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일단 감염자 모집단 파악이 정확히 되질 않는 상황에서 사망자 수만 가지고 정확한 치사율을 계산하는 것은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렇게 치명률이 불분명한 상황인데 정부가 시시 각각 발표하는 확진자 수 업데이트에 사람들은 스스로 주눅들어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찌되었든 독감 바이러스보다 위험하다? 애당초 우리는 감염에 대한 명확한 개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이는 환원론적 접근에 치우쳐 있는 현대의학의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감염은 병원체가 우리 몸에 침투하여 증식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보통 우리 몸의 (치유를 위한) 면역반응의 일환으로 붓고, 열나고, 아프는 등의 염증 증세를 동반하게 된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단지 체내에 들어왔다는 사실로 감염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또 치료를 해서 나았다고 정말 그 바이러스가 체내에서 다 사라졌을까? 코로나 환자와 접촉하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몸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이들이 몸 전체에 확산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또한 독감, 폐렴, 코로나 바이러스 등 기도 감염의 경우 이것이 사망의 주원인인지 아니면 기저 질환 등 주원인과 연관된 부차적 사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인지를 제대로 구분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다. 가령 최근에 영국 Lancet의 지난달 어느 논문은 대규모 역학조사 결과라며 코로나 바이러스가 독감 바이러스보다 몇배 더 치명률이 높다는 주장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들은 바이러스 종류와 사인(死因) 간의 통계적 비일관성 문제를 흔히 노정한다.
가령 코로나 바이러스는 상기도부터 폐까지, 아니 몸 전체 조직을 대상으로 하나의 병인으로 진단하면서, 독감의 경우는 만약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상기도에서 폐로 넘어가기만 해도 폐렴으로 사망 원인을 돌릴 수 있는 것도 독감 사망자 수를 낮추는 통계의 착시를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도를 여타 다른 기도 감염 바이러스들의 그것보다 훨씬 인위적으로 높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질병 통계적 왜곡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가령 한국에서 독감, 폐렴을 일으키던 바이러스들은 작년 한 해 다 어디로 도망갔을까?
물론 코로나 19는 걸리지 않는 것이 걸리는 것보다 낫다. 병에 걸리면 일단 불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걸린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독감에 걸린다고 죽지 않는 것처럼. 단지 코로나와 독감 바이러스 모두 면역체계가 약해진 기저질환자나 고령자의 몸 안에서는 쉽게 기도를 거쳐 폐까지 신속하게 조직과 장기를, 그리고 혈류를 통해 몸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위험군이 아닌 이상 대부분 별다른 치료 없이도 완쾌된다는 점은 코로나와 독감 바이러스가 공통으로 가지는 가장 본질적인 유사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병독성(virulence)에 관한 논쟁이 분분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이 문제시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그 방역 정책의 비용에 대해 사회적으로 너무 무관심하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비용이라는 말을 들으면 경제적인 측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코로나 불루’를 운운하면서 우울증의 심화를 거론하는 의사들도 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초래된, 아니 정확하게는 코로나 방역 조치로 인해 초래된 가장 큰 비용(cost)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의 몸이 근 일년간이나 마스크 착용을 견디기 위해 소모한 비용, 즉 그 정도의 긴 기간 동안 건강을 희생한 댓가이다.
물론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신과에 상담 내원하는 환자 수의 증가처럼 숫자로 통계 낼 수도 없다. 가령 어떤 연구가가 1-2년 마스크 착용과 이후 생애 기간 중 암 혹은 뇌졸중 발생율의 상관 관계를 일정 수 이상의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10년 정도 이상 비교 종단 연구를 시도하지 않는 이상 수치상으로 입증하기 힘들 것이다. 통계로 나타나지 않으면 보건 의학 연구가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특정 질환들에는 그렇게 강한, 수많은 전문 분과를 가진 현대의학의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건강’이다. 가령 어떤 특정한 조치가 전체 건강에 미치는 간접적이고 장기적인 결과는 환원론적이고 분절적인 현대 보건 의학 연구가 수치 상으로 밝혀내기 힘들다. 건강을 말하면, 종합 비타민제를 신선한 공기 속에서의 산책보다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러한 현대 보건 의학이 지배하는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마스크를 하루 종일, 1년 365일 끼고 살면서, 그렇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서 제대로 신선한 공기를 몸속으로 들여보내고 노페물이 섞인 공기를 몸 밖으로 원활하게 배출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인류가 전통적으로 가장 중시해온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건강의 기본 원리는 제대로 숨쉬는 것이다. 진화적으로도 기도 점막은 장 점막만큼이나 체내에서 가장 면역기능이 활성화되어 있는 부분이다. 선택적 투과성을 가진 세포막이 상징하듯, 생리학적으로 열린 계(open system)이자 항상성(homeostasis)를 본능적으로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몸은 그 안팎으로의 원활하고 자유로운 공기 순환을 필수적으로 요한다.
과연 마스크로 코를 덮어쓰고 계속 일년 동안 살아온 작년 한 해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이 아무런 침해를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럼에도 닥치고 마스크 강제 착용이라는 방역지침에 따라야 한다? 그러면 왜 자가용은 없애지 못하는가? 이 참에 위험한 것은 다 없애 보자. 무슨 근거로 독감보다 위험하네 아니네 하는 논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백해무익한 배기가스를 내뿜고 연간 수많은 보행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자동차보다 덜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 비용? 마스크를 일 년 내내 착용하는 것의 사회적 건강 비용이 자동차를 일 년 내내 못타는 것에 오는 경제적 비용보다 과연 작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물론 이는 개인의 선택과 가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집단주의적 위선은 코로나 19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스피커에서 매번 울려 나오는, '마스크를 쓰는 것은 자발적으로 위기 극복에 동참하는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매너이자 에티켓입니다’라는 상냥한 목소리의 안내 방송에 담긴 무서운 프로파간다는 지난 일 년간 지겹도록 많이 들었다. 즉 '국가는 국민 여러분의 건강을 책임집니다.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고 싶으시다면 마스크 쓰고 입쳐닫고 숨도 제대로 못 쉬더라도 저희가 실시간 발표하는 확진자 수 업데이트와 확진자 동선 등의 정보를 순순히 잘 확인해서 저희가 결정하는 방역지침에 군말 없이 협조바랍니다’라는 논리이다. 마스크 착용의 사회적 건강 비용을 무시하는 그 무논리와 비이성성,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집단주의적 사고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불편하다. 근본적 철학적 성찰을 통해, 문제를 차분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숭의여고 역사교사 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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