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된 ‘자연상태’가 빚은 사회계약의 딜레마

한정석 / 2020-12-30 / 조회: 362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어쩌면 가장 논쟁적인 주제는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이 역설적인 이유는 사회계약론이 다름 아닌 자유주의자, 존 로크(John Locke)의 주장이라는 점에 있다. 물론 사회계약론은 로크만의 주장은 아니며 루소와 홉스도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다. 루소와 홉스를 자유주의자로 보느냐의 문제 역시 논쟁적이다. 자유주의자에게 이 사회계약은 오디세이에서 율리우스가 만나는 바다 괴물들 가운데 하나다.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사회, 엄밀히 말하자면 국가 이전의 단계를 '자연’으로 간주하고, 인간이 이 자연 속에 있었을 때 어떤 상태였는가를 통해 국가와 법의 기원과 본질을 고찰하는 방법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로크나 루소, 홉스 모두 이러한 인간의 자연 상태를 실증적 자료나 데이터가 아니라, 상상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계약론은 일종의 상상적 '사고실험’이라 할 수 있는데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원리 역시 사고실험이었으나 이들 사회계약론의 사고실험에는 법칙이나 원리라 할 만한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연 상태’라는 사고실험이 그 시대 지식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근대 계몽주의 사조하에 개인을 사회의 기초로 보는 개인주의가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저작물이 바로 '로빈슨 크루소’였다. 따라서 사회계약설에서 자연 상태의 개인은 원자적이고 고립된 개인들을 전제로 하게 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은 루소와 홉스의 사회계약론 속의 개인은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에서 '단자는 창()이 없다’고 한 점, 다시 말해 단자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교호하지 않는다’라는 개념과도 관련된다는 점이다. 근대 계몽주의, 특히 데카르트로부터 영향을 깊게 받은 프랑스의 대륙 합리론 속의 개인이 바로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적인 개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프랑스 계몽주의 속의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은 각자의 이익과 손해만을 계산해서 행동한다. 당연히 홉스는 그러한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자연 상태에서 당연한 현상일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홉스는 이러한 무자비하고 호전적인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사회계약으로 복종하기로 약속하는 절대 권력자, 즉 리바이던의 필요성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홉스의 자연 상태의 극복 필요성에 대해 영국의 로크도 대체로 동의해서 시민 정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다만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개인은 홉스와는 달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협동하는 질서가 본질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홉스와 로크의 자연 상태에 대한 이질적인 전제는 국제 정치학에서 홉스의 관점에 바탕한 현실주의와 로크의 관점에 바탕한 자유주의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루소의 생각은 달랐다.


상상적 사고실험, '자연상태’


루소 역시 사회계약을 주장했지만 루소는 홉스와 로크 모두를 비판했다. 루소는 자신의 <사회계약>에서 로크와 홉스 모두 진정한 자연 상태가 아니라, 이미 사회화된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만일 홉스의 주장대로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이 서로를 향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개인들이 사회라는 질서에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소는 진정한 자연상태라면 개인은 다른 개인에게 관심 없이 오직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원시인이라 보았다. 즉 자연 속에서 개인은 자족적이며 강자를 만나면 도망가고, 강자 역시 약자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통해 루소의 생각이 옳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연 속에서 포식자로서 위계를 차지한 맹수들은 서로를 잡아 먹자고 다투지 않는다. 사자나 표범은 사냥할 때가 아니면 가젤과 같은 약자적 위치에 있는 동물들을 잡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언가 개인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불평등이 질시와 분노를 일으키고 있으며 그러한 상태는 자연 상태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 상태라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었다. 즉, 루소에게는 자연상태에서 갈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크의 자연 상태도 문제가 있게 된다. 만일 로크식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이 자발적 협동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연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루소는 로크와 홉스 모두, 자신의 정치적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 자연상태를 견강부회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게 된 것이다. 


루소의 이러한 비판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루소는 '자유주의자인 당신들의 그러한 자유 상태는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로크의 소유권적 자유주의에 반발하며 이를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정당성외에 다른 어떤 고찰할 만한 것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로크가 천부인권을 주장했을 때 여실히 드러난 것이었다. 


로크는 당시 왕당파가 왕권에 대해 신이 부여한 천부적 권리라는 것, 즉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시민정부론을 비난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이에 로크는 '왕이 아닌 우리도 신으로부터 같은 권리를 받았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로크의 이러한 주장은 주장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비난에 가까운 것이었다. 왕당파의 왕권신수설이나 시민파의 천부인권설은 원리라기 보다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진영논리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루소가 보기에 로크나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인간의 자연 상태를 규정하는, 그래서 허구적이라는 주장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루소의 사회계약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일까.


애덤 스미스가 놓친 루소의 '인정 욕구'


루소는 개인들의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평등했던 자연 상태가 사유재산의 등장으로 불평등의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주장했다. 누군가가 자연의 어떤 것을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타인의 점유나 이용을 배제하기 시작하고 또 그러한 것을 사유하지 못한 개인들이 소유자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일종의 박탈감과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루소는 사회적 조건이 불평등을 야기하고, 불평등은 투쟁을, 그리고 투쟁은 국가를 낳았다고 성찰한 것이다. 사회와 함께 불평등이 생겨나고 국가(정부)가 형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루소는 이러한 인간의 심인적 특성을 '인정에 대한 욕구’라고 불렀다. 루소의 이러한 성찰은 영국의 애덤 스미스가 인간의 본성에는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자리심(自利心), 즉 self-interest와 함께 타인의 불행과 슬픔에 공감하는 제3의 관찰자가 있다는 점과 비교해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루소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분노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분노는 타인의 부당한 피해에 공감하는 애덤 스미스적인 분노가 아니라,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물론 루소가 그러한 분노를 정당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루소는 근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루소에게 불평등의 한도는 '돈 때문에 자신을 팔 정도가 아닌’것에 한 했다.


루소는 사회에서 인간의 이러한 인정 욕구가 개인의 분발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분노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루소가 자연권적 자유권의 시대의 야경국가론에서 사회권적 자유라는 현대 복지국가로의 정치적 변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루소의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배척할 것인가. 그것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자유주의자의 험난한 오디세이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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