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보수담론 어떻게 형성되고 소비되나

자유기업원 / 2006-11-15 / 조회: 5,492       경향신문, 6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가자.” 출범 초기 참여정부가 외친 중요한 구호 중 하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4개월 후인 2003년 6월30일 ‘참여정부 경제비전 국제회의’ 개막연설을 통해 “2만달러 시대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후 노대통령은 틈만 나면 ‘2만달러 시대’ 얘기를 꺼냈다. 노조 지도부를 비판할 때도 “2만달러 시대의 선결 조건은 노사화합”이라고 말했고, “2만달러 시대를 위해선 시장과 기술 모두 혁신을 일상화해야 한다”고도 했다. 정부 각료들은 ‘2만불 시대로의 항해’와 같은 기고문을 언론에 싣고 적극 홍보에 나섰다.

이‘2만달러 운동’은 선진국 반열에 들기 위해 분배보다는 성장과 개발에, 노조 활동보다는 기업 활동에 좀더 힘을 몰아줘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출범 전만 해도 최소한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외쳤던 참여정부가 왜 갑자기 이런 구호를 내세웠을까.

‘2만달러 시대론’은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었던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아이디어는 삼성경제연구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전경련은 노대통령이 취임하던 2003년 2월25일 “새 정부와 함께 2만달러 시대를 열어갑시다”라는 현수막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건물에 내걸었다. 그에 앞서 인수위 시절인 그해 2월7일에는 전경련 총회에서 새 정부에 대통령 직속기구로 민관합동 ‘2만달러 추진위원회’ 신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2만달러 시대’의 원조는 삼성경제연구소란 얘기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인수위 시절부터 참여정부에 많은 정책 아이디어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해 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윤순봉 부사장은 “인수위 시절 우리가 만든 대외비 보고서가 대통령 당선자에게 건네졌다는 항간의 추측은 확인해줄 수 없다”면서 “그러나 우리가 참여정부에 많은 정책적 아이디어를 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도 노대통령이 2만달러 시대를 얘기하기 한달쯤 전인 2003년 6월5일 2기 신경영 선언을 통해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선진국이 될 수도,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에 파이를 빨리 키워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돌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여정부를 포함, 한국 전체가 갑자기 ‘2만달러 시대론’의 포로가 되면서 반론을 허용치 않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난데없이 등장한 구태의연한 구호가 내용적 충실성 없이도 국가발전의 핵심 비전이 돼버린 사회 분위기에 아연해 한 적이 있다. 뭔가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온 사회가 그 방향으로만 흘러갔다”고 회고했다.

‘2만달러 시대’는 갓 출범한 참여정부의 보수화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보수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지, 보수담론의 재생산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매력있는 한국” “개인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 “15년 안에 못하면 영영 선진국 못될 수도….”

‘2만달러 시대’와 비슷한 함의인 이 말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의제로 발전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의제의 유경은 잊혀지고 사람들은 그냥 물, 공기처럼 당연시 받아들인다. 그러면 시민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사회의 의제로 자연스럽게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말들은 우리를 한시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타인과의 경쟁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인양 몰아간다.

그러면 이 얘기들은 누가 만들어냈고, 어떤 과정을 통해 확산돼 우리 머릿속에 튼튼히 뿌리내리게 됐을까. 이 물음은 곧 한국사회의 보수담론이 어떻게 생산돼 어떻게 소비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꿔 볼 수 있다.

강력한 보수 담론의 생산은 주로 재계 관련 연구소와 이른바 신(新)보수 지식인들에 의해 이뤄진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구시대적 냉전 논리 등으로 무장한 구보수, 이른바 수구세력들은 담론 생산 능력까지 갖고 있지는 못하다”며 “대신 삼성경제연구소와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처럼 재계에 밀착된 민간 싱크탱크들이 연구를 통해 보수 담론을 생산해 정치권과 언론을 통해 사회 전반에 제공한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낸 돈으로 설립된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심포지엄, 출판, 각급학교 자본주의 경제교육 등을 통해 시장 가치의 확산과 반기업 정서 없애기, 기업하기 좋은 국가 분위기 조성 등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유석춘 연세대 교수(현 한나라당 참정치 운동본부장)가 대기업들이 지원한 자유기업원 연구자금으로 “참여연대는 교수와 시민운동가들이 정권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라는 ‘참여연대 보고서’를 펴내며 참여연대의 삼성 비판에 역공을 편 것이 좋은 예이다. 전경련은 또 해마다 ‘중국 산업시찰’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주요대학의 학보사 기자들을 데리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 견학을 시켜준다. “대학생이 매주 접하는 학보에 중국에서 활약하는 우리 기업의 노력을 게재함으로써 (대학생들의) 반기업 정서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전경련이 표방하는 사업 추진 이유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좀더 ‘객관성’과 ‘전문성’으로 무장한 재계 싱크탱크로 분류된다. 재계 논리를 체계적으로 국익과 연결시키는 보고서로 정부 정책에 큰 영향을 행사해 왔다는 점에서 보수담론 생산의 핵심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소의 웹사이트 회원은 올 2월 1백12만명을 넘어 단일 연구소로는 세계에서 최다 회원을 갖고 있다. 보고서가 나오기 무섭게 웹사이트에는 “기다리던 논문이 드디어 올라왔네요”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라는 답글이 수십건 달릴 정도로 호응이 높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박사급 연구원 100여명 등 120명의 고학력 연구인력이 쏟아내는 연구 보고서들은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저출산, 연구윤리, e-스포츠, 황사피해 대응방안 등 일반인들의 최근 관심사를 망라한다. 일반에 공개되는 대외발표용 보고서만 한 해 평균 300건에 이른다.

이들이 발표하는 보고서는 여과없이 대부분 언론에 상당한 비중으로 소개된다. ‘삼성’이라는 공신력과, 그것이 담고 있는 많은 정보 때문이다. 이렇게 소개된 보고서들은 정부부처나 정치인, 교육기관, 연구자 등에 의해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의제는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의제로 재생산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올 1월 낸 ‘대학혁신과 경쟁력’이라는 보고서는 대학 사회 내에 효율과 경쟁이라는 담론이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보고서는 ▲대학사회 내 시장원리 및 경쟁원리 작동을 위한 규제 개혁 ▲국립대 법인화, 시·도립대학 전환 등을 통한 대학경쟁체제 도입 ▲엄격한 교수 평가 및 보상 시스템 ▲총장의 임기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경제신문 등을 통해 꾸준히 소개돼 온 ‘대학경영도 삼성을 배워라’라는 담론을 체계적인 보고서로 명확히 정리해낸 것이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서울대 자연과학대는 한달 뒤 전체교수회의에서 교수승급심사시 일정 비율의 탈락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자연대 교수들은 “이번 결정에는 프린스턴, 하버드 등 미국 유수 대학을 벤치마킹해 내놓은 삼성경제연구소의 대학경쟁력 확보방안 보고서가 많은 참조가 됐다”고 밝혔다.

이제 누가 들어도 익숙한 문구인 ‘매력있는 한국’ 역시 삼성경제연구소의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도시의 ‘매력있는 한국론’, 강운태 전 내무부장관이 강연에서 자주 쓰는 ‘매력있는 한국’도 모두 여기서 나온 말이다. 39명의 연구원을 대거 동원해 만든 이 보고서는 지난해 6월 국회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보고서는 잘 사는 나라의 객관적 기준을 ‘국민소득 3만달러’로 명시, 아직 달성하지 못한 ‘2만달러 시대’ 목표를 은근슬쩍 ‘3만달러’로 상향 조정한다.

“이제는 양보다는 질이 중요합니다. ‘강소국’이라는 말도 제가 2001년에 처음 쓰기 시작해서 유행한 겁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부사장의 말이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가 완전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그들의 보고서를 꼼꼼히 읽다 보면 학문적으로 함량미달인 것이 많습니다. 데이터나 논리의 오류 때문에 학술지에 지원할 경우 상당수 거절당할 겁니다. 가령 지난 9월 나온 ‘설비투자에 관한 3대 논란과 평가’ 보고서는 과잉투자 소지가 있는 90년대에 비교기준을 두고 ‘투자부진론’을 펴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8대 재벌은 이미 외환위기 이전 수준의 투자를 회복했음에도 여전히 재벌의 선도적 투자 확대론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과학성’과 ‘객관성’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국가대표로서 재벌을 키우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재계 이데올로그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보고서들이 여과없이 한국사회의 의제로 상정되는 현실입니다. 언론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보고서라면 비판적 검토 없이 그대로 소개해주고, 정부 관료들도 이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 소장을 맡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이에 대한 윤순봉 부사장의 의견은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만큼 진보적인 조직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습니까. 연 7% 성장과 4만달러, 5만달러 소득 시대를 얘기하는 것만큼 진보적일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돈되는 것을 우리만큼 고민하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위기론’ ‘성장론’ 같은 보수 담론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전통적 보수세력뿐이 아니다. 보수정당 한나라당보다 참여정부가 더 큰 역할을 했고, 이른바 보수언론을 포함한 대부분 언론이 이 과정에 동원됐다. 진보 지식인들이 이 보수 담론의 유포에 결과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김상조 교수는 “우리 사회의 진보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선 토종자본론 같은 이야기와 섣부른 사회적 대타협론이 보수, 진보의 경계를 희석시키고, 재벌체제를 통한 성장모델에 대해 진보학자들도 동의하는 듯한 여론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수 담론의 재생산을 논할 때 ‘한나라당-보수언론-보수지식인’이라는 강력한 연결 고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보수언론은 ‘뉴라이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열풍과 같이 최근 한국사회의 보수화 분위기 형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보수 지식인의 역할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은 박세일 서울대 교수. 박교수는 올초 펴낸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언론에 칼럼을 쓰며 보수담론을 전파하고 있다. 그의 ‘선진화’라는 말은 노무현 대통령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자주 입에 올릴 만큼 정치권과 지식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보수담론의 대중화에는 공병호 박사가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대기업들의 돈을 갹출해 전경련 산하에 자유기업센터(자유기업원의 전신)를 세우며 자유주의 소개에 열중했던 그는 요즘 개인 연구소를 바탕으로 왕성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환경 의제에서 보수담론이 부상하는 모습 역시 한국사회의 보수 연결고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4월 대한상공회의소가 낸 ‘주요 국책사업 중단 사례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는 “새만금, 천성산 터널공사 등이 환경단체의 문제제기로 중단됨으로써 이미 4조원의 손실이 났으며 앞으로 35조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환경운동진영은 “이 같은 계산의 근거가 된 자료는 건설사와 시공사의 주장을 여과 없이 단순 합산한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일로 환경운동진영은 많은 국민들에게 국고 낭비의 주범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환경 의제에서도 보수담론의 생산 주체는 재계다. 대한상공회의소 산하 지속가능경영원과 전경련 산하 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가 주도하고 있다. 92년 리우 환경회의에서 처음 사용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이제 기업들이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는 말이 돼버렸다.

대기업을 배경으로 한 단단한 물적 토대, 그 토대 위에선 연구소와 보수지식인들의 정력적인 의제 생산, 언론·출판 미디어 및 정당을 통한 의제의 대중적 확산, 그리고 여론의 지배. 한국사회는 아직 이 재생산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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