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차례에 걸친 분단과정을 겪었다. 한반도의 1차 분단은 일본의 항복이후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지상군 작전권을 38°선을 경계로 나누었던 것이 단초가 되었다. 이는 포츠담 조약이후 포츠담 체제의 범주(미국과 소련 간 이념의 대립)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또한 2차 한반도 분단은 6.25 전쟁 이후 휴전조약에 따른 휴전체제인데, 1차와 2차 분단의 차이점은 분단의 국제법적 책임국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구상된 것은 아니었다. F. 루즈벨트의 구상에 따라 해방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신탁통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45년 5월 8일 나치독일이 항복하자, 태평양에서도 전쟁을 신속히 종료하고자 했던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에게 소련의 대 일본전 참전을 제안하면서, 한반도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공산주의의 팽창을 시도하려 했던 소련은 미국의 한반도 분할점령 제안을 수용했다. 소련의 대 일본전 참전을 전제로 미국은 포츠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동아시아에서의 작전구역을 설정하는 작업을 했다. 여기서 미국이 제안했던 작전구역을 살펴보면, 일본은 전체가 미국의 작전구역이고, 한반도에서는 해상, 항공 작전권 전체를 미국이 갖고, 지상군의 작전권은 38°선 이남을 미국이 갖는 것이었다.(FRUS, 1945 Vol. 2, The Conference of Berlin, The United States Chiefs of Staff to the Soviet Chiefs of Staff, 1945년 7월 24일, 1327~1328쪽)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지상군 작전권을 38°선을 경계로 제안했던 이유는 첫째 포츠담 회담 기간 중에 소련은 독일 동부지역을 포함한 동유럽지역에서 자국이 점령한 지역에 대한 “사회주의적” 기득권을 요구했기 때문에(이들 지역들은 이후 모두 공산화됨), 일본에 소련군이 진주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둘째 미 지상군이 한국에 상륙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를 허용했지만, 전체 한반도의 지상 작전권을 소련에게 준다면, 동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기득권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일단 절반만 허용하고, 일본의 항복 이후에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신탁통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한다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에서 미국은 소련의 참여를 허용했음을 의미했다.
결국 태평양 전쟁을 신속히 종결하고자 했던 미국은 소련의 참전이 절실했었고, 참전의 조건으로 한반도에 대한 절반의 기득권을 양보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련군은 참전을 보류하면서, 더 좋은 조건(만주와 일본에 대한 군사적 기득권)을 얻어내기 위해 시간을 끌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미국은 일본에 원폭투하(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도리어 불허할 수도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에 진입했고, 8월 15일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 직전인 8월 14일까지 38°선 이북지역을 신속하게 점령하였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에 비로소 인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38°선 이남 지역으로 점령지역을 넓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 점령지역에 대한 “사회주의적” 기득권을 주장했던 소련이 한반도에서도 미국과 유사한 갈등을 야기시키며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8°선 이남 지역에서 일본군이 치안을 유지하다가 미군에게 평화롭게 인수인계 할 수 있었다.
만약에 미국이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를 포츠담 회담 기간 중에 결정했다면, 소련군을 태평양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지 못하고, 한반도는 미군이 단독으로 점령하면서 예정대로 미국에게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소련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종결지으려 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기득권의 절반을 소련에게 양보했고, 이로 인하여 한반도의 1차 분단의 원인이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기득권을 소련에게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는 소련의 “사회주의적” 기득권에 따른 일방적인 공산화를 피할 수 있었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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