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와 시대정신 이야기

도서명 기업가와 시대정신 이야기
저 자 공병호
페이지수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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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이야기 시리즈 26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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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건 이익의 충돌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법과 제도를 구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지 올바른 법과 제도만으로 안정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없다. 특정 사회의 구성원들이 올바른 사고의 틀을 갖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한 사회를 이루는 다수가 잘못된 사고의 틀에 바탕을 두고 선택을 하는 경우, 사람들은 올바른 법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 내고, 그 사회는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사회의 번영이란 주제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사고의 틀a way of thinking`만큼 중요한 것도 드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회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련의 개혁 작업이 필요할 경우,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지도자의 확고한 철학과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개혁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지도층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자질과 함께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 분위기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시대정신의 주역인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시대정신은 제대로 된 개혁을 위한 지적 인프라스트럭처intellectual structure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두고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IEA 소장인 존 블란델은 `사상 전쟁의 수행Waging of War of Ideas`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적풍토가 진보를 앞세운 국가개입주의에 의해 압도되고 있을 때,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책이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44년에 출간된 하이에크 교수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이 바로 그것으로 미국에서는 시카고 대학판이 나온 이후 그 요약본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렸고, 이어 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게 되었다. 하이에크 교수가 거둔 성과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정부개입주의가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하이에크의 저서는 이후 자유주의의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은 잠자고 있던 몇몇 자유주의자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노예의 길』에서 감명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자유주의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한 인물들로 미국의 헤럴드 루노Harold Luhnow, 레너드 리드Leonard Read, F.A.하퍼F.A.Harper, 그리고 영국의 앤터니 피셔Antony Fisher를 들 수 있다.


헤럴드 루노는 『노예의 길』을 읽은 뒤에 철저한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볼커기금William Volker Fund의 이사장으로서 자유주의의 확산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노는 볼커기금을 통해 첫째, 그 당시 미국 내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하이에크, 루드비히 폰 미제스, 아론 디렉터 등 세계적 학자들을 지원했다. 둘째, 소수의 자유주의 학자들이 만나서 토론하고 생각들을 나눌 수 있도록 지원했다. 셋째, 자유주의에 대한 교육과 계몽사업의 추진에도 큰 기여를 하였는데, 1961년에 설립한 인문과학연구소IHS가 그 예이다. 넷째, 자유주의에 입각한 서적들을 출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끝으로 `개인주의자들의 대학간 협회ISI`, `경제교육재단FEE`, `이어하트 & 레임재단The Earhart and Reim Foundation` 등과 같은 자유주의 연구소의 설립을 지원했다.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 구원해 낸 또 한명의 인물로는 레너드 리드Leonard Read를 들 수 있다. 그는 1939년부터 미국에서 가장 큰 상공회의소인 로스엔젤레스 상공회의소의 회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자유주의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 리더가 미국 사회에 남긴 최고의 업적은 자유주의를 체계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경제교육재단the Foundation of Economic Education을 1946년에 설립한 것이었다. 리드는 37년간 경제교육재단의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자유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교육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는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교육재단은 미국이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F. A. 하퍼 역시 루노와 리드처럼 『노예의 길』을 읽고 자신의 인생항로를 바꾼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노예의 길』을 만날 당시에 그는 코넬 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였다. 그는 즉시 이 책을 이용하여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던 대학에서는 이 강의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사건 이후 하퍼는 레너드 리드와 합류하여 경제교육재단의 연구원이 되었으며, 1950년대 중반에는 볼커 기금의 선임연구원이 되었다. 1961년에는 자리를 옮겨 인문과학연구소IHS를 설립했다. 인문과학연구소IHS는 1970년대 말부터 우수한 인재를 스카웃하여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나 지성인으로 양성하는 일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지성적 사업가는 앤터니 피셔Antony Fisher이다. 『노예의 길』을 읽고 감명을 받은 그는 하이에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치에 입문해야 할까요?" 그가 물었다.


"아니오" 하이에크는 대답했다. "사회의 진로는 오직 사상의 변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먼저 당신은 합리적인 주장으로 지식인들, 교사와 작가들을 설득하십시오. 이러한 사상이 그들의 영향으로 보편화되면 정치가들은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피셔는 1955년에 `런던경제문제연구소IEA`를 설립하여 자유경제와 지식인들을 위한 활동무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마지막 두 명의 경제학자`라고 불리던 랠프 해리스Ralph Harris와 아서 샐든Arthur Seldon을 초빙했다. 그러고 나서 런던경제문제연구소는 일련의 독립적인 연구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대부분 학자들에 의해 저술되었지만 쉽게 쓰여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여론은 명백하게 정부의 개입이 아닌 시장의 해법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런던경제문제연구소IEA는 분명히 그 책임을 다했다. 1979년, 수상취임을 앞둔 대처 여사는 피셔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자유주의 사상의 확산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것은 미국의 헤리티지연구소의 설립과 눈부신 성장을 들 수 있다. 헤리티지의 등장은 `지성적 기업가`와 현실세계의 `기업가`가 힘을 모아서 만든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헤리티지의 창립에 기본 아이디어를 가졌던 지성적 기업가들은 퓨러너Edwin J. Feulner와 위릭Paul M. Weyrich이라는 두 젊은이였다.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던 이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정교하게 조직된 정책결정기구를 갖고 있는데 반하여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에 필적할 만한 어떤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데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 때 이 젊은이들의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등장한 중요한 인물이 쿠어스 맥주의 창립자인 조셉 쿠어스Joseph Coors였다. 쿠어스는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저명한 검사였던 루이스 포웰Lewis F. Powell에 의해 만들어진 5천자 가량의 강연초록을 읽고, 그가 세운 회사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업가들과 그들이 만든 단체들이 미국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대해서 그 이유를 궁금해 하였다. 조셉 쿠어스가 자신이 세운 회사가 정치적으로 더욱 깊게 간여하기로 결정한 이후 당면한 최고의 문제는 어떤 조직을 지원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쿠어스의 눈에 30대 초반의 두 젊은이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퓨러너와 위릭을 중심으로 한 창립자들은 1973년에 조셉 쿠어스가 기증한 25만 달러의 기금으로 헤리티지재단을 설립했다. 쿠어스에 이어서 존 스케이프John Scaife, 노블재단Noble Foundation, 존 M. 올린John M. Olin 재단 등이 헤리티지를 후원했다. 이렇게 해서 퓨러너가 헤리티지재단의 소장이 된 1977년경에는 연간 예산이 2백만 달러를 넘어섰고, 때로는 연간 30%의 신장률을 보여 1983년에는 1천만 달러, 1989년에는 1천8백만 달러에 달했다. 현재 헤리티지재단을 지원하는 지원자 수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각종 재단을 포함하여 약 2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헤리티지의 성장은 퓨러너라는 지성적 사업가의 눈부신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어떤 사회든 구성원들이 자유주의를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 사회가 계속해서 번영의 길로 달려갈 수 없다. 이미 우리 사회는 지적 인프라스트럭처의 부재로 말미암아 상당한 진통을 겪어 왔고 앞으로도 더 겪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누군가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우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자유주의자들의 힘을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 기업가들, 반공주의자들, 대다수 중산층들, 소수의 자유주의 지식인들, 이 모두가 자유주의가 이 사회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는 데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힘을 모아서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니시어티브를 잡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시대정신의 중요성을 자각한 성공한 기업인들과 시대정신의 확산을 도울 수 있는 소수의 지식인들, 다시 말하면 `지성적 기업가intellectual entrepreneur`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공한 기업가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지식인들에게 돈을 기부하거나 지원할 때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단에서 일하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 즉 기증자의 재단설립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를 위해 일생 동안 매진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 특정 사상, 정책, 운동 등에 관한 전반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후원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대학 내부 혹은 외부에 독립적인 연구센터나 싱크탱크think tank를 설립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일반 대학의 정치적 흐름과는 동떨어진 것이어야 한다.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 적임자에게 올바른 환경을 제공하라. 아무리 적임자라고 해도 그가 속한 기관의 환경이 좋은 지원을 해 주지 못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관의 상부 혹은 하부로부터 나오는 냉소주의는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망칠 수 있다. …… 앤드류 카네기가 깨달았듯이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은 장기간에 걸쳐 기증자의 원래 취지를 기꺼이 지원해 줄 의사가 있는 그러한 수혜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러한 의사가 없다면 재산을 기증하는 것도 그저 바람 앞에 돈을 뿌리는 것과 같다."


"사업은 그저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는 식물이 아니다. 즉 기업은 특정한 정치적 환경political environments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가들은 생존의 차원에서 자기가 속한 정치사회political society를 감시할 책임이 있다. 기업가들이 역사 속의 다른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자유를 사랑하고 흔히 자유사회의 선봉이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업의 생존은 자유사회라는 체제의 생존에 달려 있으므로, 기업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자유사회를 지탱하는 원칙들을 잘 알고 지키는 다수 사람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면서 유지할 책임을 강하게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