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고위공직 개방에 관한 제안

박효종 / 2002-08-26 / 조회: 5,496

No.010

정부는 2002년 1월19일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법률 제 6622호로 공포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외국의 우수 전문인력을 충원함으로써 행정의 전문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보안 및 기밀에 관계되는 분야가 아닌 연구'기술'교육'자문 등에 외국인을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따라서 지난 7월부터 해당되는 외국인은 한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아도 정식 공무원에 임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외국인도 국가공무원으로 임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우리는 이 법의 취지에 동감하고 그 시행을 크게 반기는 입장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개방의 질과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직에도 외국 국적의 인재가 충원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우리가 고위공직의 외국인 개방에 대하여 강력하게 제안할 수 있는 이유도 이른바 ‘히딩크 신드롬’에 의하여 크게 힘을 얻은 것인지 모른다.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루면서 우리는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라는 기상천외한 구호를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낱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사구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기업과 금융권은 물론, 연구소와 대학들도 ‘히딩크 리더십’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히딩크 따라잡기’에 열성적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난 6'13지방선거에서도 유력한 서울시장후보 및 대선후보들은 남에게 뒤질세라 “내가 바로 히딩크”라는 점을 선전하는데 열을 올렸다. ‘히딩크 신드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여느 신드롬처럼 소리없이 사라질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의 신드롬이 일시적인 바람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연줄과 파벌 및 외풍을 단호히 떨쳐버린 ‘히딩크 리더십’은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할 화두(話頭)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민주화를 이룩한 후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고 ‘민주주의의 질(quality of democracy)’을 한 단계 고양해야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혈연'지연'학연 등 전통사회의 특징적 가치였던 연고주의라는 사실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고주의는 실적(achievement)보다 귀속적(ascriptive) 가치를 우선시하는 태도다. 왜 우리정치가 비용은 높고 효율은 적은가. 왜 우리정치에서 ‘비리게이트’와 부정부패가 그치지 않는가. 자괴감을 떨치기 힘든 우리정치의 후진성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연고주의의 역기능 때문이다.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개혁을 표방하고 정치의 선진화를 외쳤지만, 결국 권력비리와 낙하산 인사, 지역편중인사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의 정치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김광웅 전 중앙인사위원장도 공직을 떠나면서 “혈전(血栓)이 끼듯이 인사에 혈연'지연'학연 등이 얽혀 부처업무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탄했을까.

흥미로운 것은 정치권이나 행정부에서는 ‘히딩크 신드롬’을 득표극대화나 정국반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반면, 경제계에서는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히딩크식 용병술을 경영에 접목하고자 하는 적극적 시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건희 삼성회장은 “국적에 관계없이 인재를 뽑겠다”고 공언함으로 재계에도 ‘히딩크 최고 경영자(CEO)’가 탄생할 수 있음을 예고했으며,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회장도 임원들에게 “히딩크처럼 실력에 의한 인재중용과 기초에 충실한 과학적 조직운영 등은 경영에도 원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신토불이’를 외치면서 “토종기업은 토종이 이끌어야 한다”며 외국인 영입을 꺼려 왔던 일부기업들도 외국인 영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대학에서도 외국인 교수채용을 확대하고 있다. 사립대나 국립대를 막론하고 외국인 교수채용 등을 통해 기존의 폐쇄적 임용관행에서 벗어나 개방형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교육의 질 향상과 학문적 수월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대는 전임교수 1615명 가운데 3명에 불과한 외국인 교수를 100여명 선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왜 유독 정치와 행정영역에서는 외국인 문호개방에 인색한 것일까. 경제는 이윤추구에 관련된 행위로서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고 학문에도 국경이 없는 것으로 보는 반면, 정치는 애국애족과 관련된 행위로, 따라서 정치지도자는 『칼레의 시민』에 등장하는 쥐스타트 쌩피에르처럼 애국과 순국정신에 온몸을 불살라야하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럴 법도 하다. 국제화를 외치면서도 순혈주의를 숭상하는 한국에서 외국국적을 취득했던 인물이 장관이나 정부고위관리로 임명되는 사례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고위공직자의 이중 국적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로서 이에 연루될 경우 ‘비애국자’로 치부하려는 시각이 강한데, 송자 전교육부장관이나 미국국적을 취득한 아들을 둔 장상 전 총리서리의 경우도 이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물론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은 대통령 자격을 미국적 소지자로 명시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연방 등기소(Federal Register)’에서는 국적 포기자를 배신자처럼 등록해 놓았다가 이들에게 국적회복이나 공직취임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공직자, 특히 고위공직자가 갖추어야할 일차적인 정치적 덕목(political virtue)은 바로 애국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점을 인정하면서도 국내정치현실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한국국적을 가진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쟁은 무조건 권력을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무엇을 위해 권력을 잡으려하는지 관심조차 없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위한 권력투쟁이 사회를 통합하는 효과를 갖는 품위있는 정치 보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저급한 정치를 산출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깨끗한 정치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은 정치상황을 타개하고자 국회의원, 관료는 물론 대통령까지 수입할 수는 없을까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물론 세계적으로 볼 때 그러한 사례가 전무한 것도 아니다. 한 예로 홍콩과 싱가포르의 공무원수준은 세계적이다. 세계경제 포럼(World Economic Forum)이나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등에서 해마다 조사하는 각국 관료사회의 경쟁력, 효율성, 청렴도 순위를 보면 이 두 나라는 아시아에선 항상 1, 2위를 다투며 전 세계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안에 든다. 이 두 도시국가 공무원이 유독 우수하게 평가되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콩의 경우 능력만 있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고액연봉으로 스카우트해 홍콩정부내 실'국장급이상 고위직 140명중 20여명이 외국인들로 채워져 있다. 싱가포르도 홍콩 못지않게 외국의 능력있는 인재들을 끌어드린다. 이것이 민간기업보다 싱가포르 관청에 더 똑똑하고 재주있는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유다. 또 고대에서도 “아테네인의, 아테네인에 의한, 아테네인을 위한” 정치를 고집했던 아테네와 달리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로마인이 될 수 있도록 한 개방적 국적제도가 ‘작은 로마’를 ‘큰 로마’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지적도 매우 교훈적이다.

우리로선 외국인 공직자가 내국인 공직자에 비하여 비교우위를 갖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연고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는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히딩크 지도력’을 본받자고 외치고 있지만, 히딩크의 팀운영과 선수관리방식이 국내감독에 의해 실천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연'지연 등 연고주의를 타파한 그의 능력발휘는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한국인이었어도 가능했을까. 한국인 감독이 연고주의를 과감히 거부했다면 능력을 앞세웠다는 칭송보다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놈”이라고 왕따가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혹은 “모진놈”으로 낙인이 찍혀 적자생존이 불가능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결국 연고주의는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이 연고주의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는 탁월한 공사를 하는 기업도 국내에서는 부실한 공사를 하기 일수다. 공사감리도 연고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다 보니 엄격한 관리나 감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수대교 복구공사에도 외국인 감리회사가 감리를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한국 감리회사의 감리기술이 외국회사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감리회사와 시공사가 동창과 동문 동향으로 얼키고 설키다 보니 ‘이익의 상충관계(conflict of interests)’를 유지하지 못하고 담합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연고주의가 판치다보니 회계감사도 부실한 감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패방지법이나 돈세탁방지법이 있어도 실효성이 없는 이유는 ‘끼리끼리’의 폐쇄적 문화와 인간관계 덕분이다.
이에 반해 개방은 연고주의와 공존하기 어렵고 능력을 중시하는 세계적 기준(global standard)의 도입을 가능하게 만든다. 개방은 우리에게 기존의 인연과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하고 세계적 기준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 만든다. 그렇다면 개방만 하면 언제나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물론 그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개방이 삶의 질 향상에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이라고는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방의 결실을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각별한 노력과 능력이 필요하다. 1990년대 중반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비쇼베츠를 영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렇게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축구에서의 외국인 감독의 초빙실험이 성공리에 끝나고 경제'경영'교육'연구 등의 영역에서 이와 유사한 희망찬 실험과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나 행정영역에서 실험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책결정분야에도 외국인 공무원임용을

특히 연구'교육직에는 외국인공무원을 허용하면서도 공권력행사나 정책결정분야에서 제외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분야는 성격상 전문적 식견이나 지식보다 정치적 헌신과 애국심이 현저하게 요구되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헌신과 애국심은 반드시 내국인에게 한정된 정치적 덕목은 아니다.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처럼 미국인이지만 이승만 박사의 국제정치고문을 맡아 유엔을 무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해 건국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사람도 없다. 그 결과 그는 “절반의 한국인”으로 불리운다. 또 본인의 애국심 소지여부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일 수도 있다. 거스 히딩크는 비록 네델란드인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 피난처를 발견한 하멜과는 달리 탁월한 지도력을 통하여 대~한민국에 관한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태극기에 관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다. 신세대 젊은이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자랑스러워요”라고 울먹이며 소리칠 수 있도록 마력을 발휘한 사람은 내국인이 아니라 벽안의 눈을 가진 외국인이 아니었던가. 또 한국의 오지에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외국인 선교사들, 외국에서 탈북자를 돕고 있는 독일인의사 폴라첸도 “한국에 대한 사랑은 한국인 이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외국인임에 틀림없다.

공권력행사와 정책결정분야야 말로 한국정치가 투명성을 결여한 영역으로 공정성과 관련하여 가장 비난을 받는 분야이기도하다. 끊임없이 권력비리와 부정부패가 발생하는 진원지도 바로 이 분야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끼리끼리”의 연고주의 문화가 창궐하다보니 견제와 균형을 발휘할 수 있는 대안세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사회는 모두가 한 식구와 다름없다. 누구든지 남을 부를 때 고유한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없고 “형”이나 “오빠”, “선배” 아니면 “후배”다. 하다못해 식당에서 서브하는 아줌마를 부를 경우도 ‘언니’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문화가 정치영역으로 이식되었을 때 역기능은 부정부패와 권력비리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로 이 분야에서 외국인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다면, 다른 분야보다 바로 이러한 분야의 공직이 외국인에게 개방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초빙하자는 식의 발상이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법률적으로 기반을 갖는 제도화가 이루어질 때 한국의 정치가 진일보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권력행사나 정책결정분야에도 외국인 공무원임용이 가능하도록 국가공무원법이 재개정되어야 할것이다.

박효종(서울대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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