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화폐제도

김영용 / 2002-12-03 / 조회: 6,272
No.051

1. 문제의 제기

화폐제도의 운용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다. 첫째, 어떤 화폐제도하에서 화폐 가치가 예상외로 크게 변동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둘째, 화폐 공급의 주체가 누구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두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화폐 제도와 화폐 공급에 관한 이러한 논의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거래수단으로 사용하는 화폐라고 하더라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화폐발행에 정부의 개입이 없었을 때는 화폐제도가 자연스럽게 진화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화폐발행으로부터 시뇨리지(seigniorage)를 얻기 위해 물품화폐제도나 자유금융제도의 단점과 실패를 일반 대중에게 부각시키고 선전함으로써, 오늘날의 부분준비 영화(令貨: fiat money)제도를 정착시켰다. 그 결과 정책적으로 화폐 공급을 조절함으로써 화폐적 경기 순환을 초래하게 되었다. 즉, 화폐제도는 시장에서 진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 개입으로 그 진화를 멈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폐는 예외적인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그러한 인식은 별다른 의문 없이 그렇게 인식하도록 훈련되어 왔을 뿐, 다른 대체적인 화폐제도가 현재의 제도보다 더 열등하다는 이론과 실증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하이에크(Hayek)는 화폐발행에 있어 민간도 정부와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로스바드(Rothbard)는 금본위제도하에서는 인플레이션이나 화폐의 급격한 가치 변동이 있을 수 없다는 점과 현재의 화폐제도는 정부 개입의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영화제도의 문제

(1) 중앙은행의 화폐 발행 독점권

한국의 중앙은행에 관한 포괄적 규정을 담고 있는 한국은행법 제1조는 한국은행의 주요 업무가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을 통한 물가 안정임을 명시하고 있다. 즉, 한국은행은 매년 정부와 협의하여 물가 안정 표적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통화신용정책을 성안하여 운용방침을 공표하게 되어 있다. 또한 한국은행법 제47조는 한국은행이 유일한 화폐 발행 기관임을 규정하고 있고, 제48조는 한국은행권은 법화(法貨: legal tender))로서 모든 거래에 아무런 제한 없이 사용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관련 규정에서는 한국은행이 거시 경제 지표를 기초로 화폐 발행을 신축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화폐 발행에 대한 구체적인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화폐발행 시장에 민간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화폐 발행에 있어서 경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쟁이 없는 만큼 다른 대안하에서의 효율성과 비교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필요에 의해 원하는 만큼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셈이다. 즉, 중앙은행의 화폐 발행 독점으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견제 장치가 사실상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자유금융(free banking) 제도하에서 각 은행의 인플레이션 유인을 견제하는 주요 장치로는 은행을 이용하는 고객의 수와 은행에 대한 신인도이다. 먼저 자유금융 제도하에서는 최소 요건만 충족되면 자유롭게 은행을 설립할 수 있으므로 시장에는 많은 은행이 출현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은행의 고객의 수는 작게 마련이다. 또한 각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은 그것이 무엇이든 정화(正貨: specie)로 태환된다. 그러므로 한 은행이 은행권 발행을 증가시키면 그 만큼의 정화가 다른 은행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각 은행은 정화의 양을 늘리지 않는 한, 은행권 발행에 제한을 받게 되므로 인플레이션이 효과적으로 방지될 수 있다. 또한 특정 은행에 대한 신인이 떨어지면 사람들이 그 은행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므로 각 은행은 은행권 발행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견제 장치는 모두 각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에 대한 태환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등장으로 이러한 견제 장치는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이제 각 은행은 모두 중앙은행의 고객이기 때문에 모든 은행은 중앙은행권을 화폐로 사용하고, 이는 금이나 은 등의 정화로 태환되지 않는다.

(2)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 통제나 금융 전반에 관한 업무를 자율적으로 수행하고, 중앙은행의 의사에 반하는 정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을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 권력이 막강한 한국의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삼권 분립이 잘 되어 있는 미국의 경우에도 연방준비은행의 독립성이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정권에 따라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설령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정치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보장된다고 해도 화폐 발행이나 그 양의 통제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3) 통화신용정책의 문제

케인즈에 의한 관리통화제도의 성립 이후, 통화신용정책에 관한 경제학자간의 논쟁은 재량이냐 아니면 준칙이냐 하는 것이다. 재량정책을 주장하는 소위 적극론자들에 의하면 통화 당국이 경제 상황에 맞추어 화폐의 공급을 자유 재량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원활한 경제 운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프리드만(Friedman)과 같은 준칙주의자들에 의하면 화폐가 단기적으로 실물 부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지식으로 장기적 효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재량보다는 엄격한 준칙에 따라 화폐 공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격한 준칙에 의한 통화신용정책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굳이 새로운 화폐 제도를 논의할 필요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나 정책 당국자들의 유인이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다. 영화제도 역시 엄격한 준칙에만 입각한다면 예측 가능하며 안정적인 화폐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선의 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발행자의 재량에 의존한다면 발행 비용이 매우 낮기 때문에 무한정 발행될 수 있다는 점에서 최악일 수도 있다. 따라서 관리자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데,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최선이기보다는 최악일 가능성이 높다.

3. 대안적 화폐제도

현재의 화폐 제도에서 새로운 화폐 제도로 이행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수반될 것이다. 행정적인 비용과 법제적인 비용도 크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는 데 수반되는 비용이 가장 클 것이다. 즉, 하나의 화폐 제도에서 다른 화폐 제도로 이행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조정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영화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화폐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물품화폐제도로 복귀하는 문제와 화폐발행에 민간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1) 물품 화폐제도

물품화폐제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진화되어 온 제도이며, 주로 금과 은이 화폐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화폐로 사용되는 물품은 그 공급과 화폐적'비화폐적 수요 변화에 의해 그 가치가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적합하다. 그 요건은 1) 공급곡선이 안정적이고 탄력성이 높을 것, 2) 비화폐적 수요가 안정적이고 탄력성이 높아서 공급변화나 화폐적 수요 변화에 순응적일 것, 3) 공급과 비화폐적 수요가 안정적이고 그 규모가 화폐적 수요에 비해 클 것, 4) 공급과 비화폐적 수요가 불안정적이나 그 규모가 화폐적 수요에 비해 작아서 화폐 가치의 변동이 화폐적 수요의 변동에만 국한될 것 등인데, 금과 은이 이러한 요건을 상대적으로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다. 물론 단점으로서는 1) 금이나 은이라는 물품 자체의 용도에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 2) 새로운 발견, 채굴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한 공급 변화와 비화폐적 용도에 대한 수요변화로 인한 가치 변화 우려, 3) 경제 성장, 경제 구조의 변화, 그리고 화폐적 수요 변화로 인한 가치 변화 우려 등이 지적될 수 있으나 2)와 3)의 현상은 매우 서서히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그다지 크게 우려할 사항은 아니다. 더구나 영화제도하에서 보다는 그 변동이 매우 작으므로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물론 부분준비 물품화폐제도하에서는 화폐로 선정된 물품을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므로 사회 전체적으로 더 낮은 비용으로 화폐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은행은 고객에게 이자를 지급할 수 있으며, 순수한 상품화폐 제도하에서보다 화폐적 수요 증가에 따른 화폐 가치의 변화가 작다는 점 등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단점으로서는 비화폐적 수요가 더 큰 수요를 구성하게 되기 때문에 화폐 가치의 변화가 화폐적 수요 변화에 민감하며, 부분준비제도이기 때문에 예금인출사태의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2) 화폐발행의 주체

정부의 화폐발행 독점권을 박탈하기 위해서는 민간이 화폐발행 시장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민간이 화폐공급을 담당했던 미국의 자유금융시기에 은행의 도산율이 높았다고 하나 롤닉과 웨버(Rolnick and Weber, 1983)의 연구에 의하면, 그 당시 은행의 도산율은 현재의 도산율과 유의하게 다르지 않으며 wildcat banking으로 인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사용이 소규모 거래에 제한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지만, 전자화폐의 사용이 범용화되면 화폐발행 주체에 대한 논의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1) 민간에 의한 물품화폐제도가 성립되면 부분준비제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은행은 일정량의 준비금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수익 자산 형태로 전환할 수 있는데, 이는 곧 고객으로부터 이자가 0인 대부를 받는 것과 같다. 다른 은행도 모두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은행들은 경쟁에 직면하여 고객들에게 이자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물론 100% 준비제도하에서는 은행들은 이자를 지불하는 대신 수수료를 받게 될 것이다.
2) 부분준비제도하에서 민간이 발행하는 물품화폐는 고객이 원할 때 화폐를 정화로 되사지 않거나 되살 수 없어 예금인출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은행 보유 자산이 충분히 유동적이고 부채보다 자산이 많으며 공황 상태에서와 같이 자산 가치가 폭락하지만 않는다면, 부분준비제도하에서도 은행은 고객이 원하면 언제든지 정화로 태환해줄 수 있다. 은행들이 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대출이나 증권의 시장가치를 실질량이 아닌 화폐량으로 고정한다든지, 자산이 부채보다 더 많은 상태에서 은행업을 시작하여 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아담 스미스가 예로 들고 있는 스코틀랜드 은행이 그러했는데, 은행들은 합명회사였고 주인은 부자들이어서 은행이 도산해도 고객들은 모두 자신의 자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 롤닉, 스미스, 그리고 웨버(Rolnick, Smith and Weber, 1997)는 미국의 자유금융시기의 민간 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은 안전하였으며 그 소지자들에 대한 지급 불능의 위험은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보이고 있다.
3) 민간에 의한 부분준비제도가 안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은행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즉, 일단 명성이 쌓이면 예금에 대한 적절한 뒷받침 없이 그 명성을 현금화한 다음 은행 소유주나 경영자들의 자산으로 빼돌린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산업 부문에서와 같이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이러한 행위가 보편화될 수는 없다. 정보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되면 고객들은 다른 은행들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4) 화폐는 단일 화폐이어야 하기 때문에 경쟁은 불가능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은행들이 동일한 화폐를 동일한 단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은행의 평판이 낮아지면 그 은행의 화폐는 할인되어 유통될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자유금융시기에 그러했다. 또한 은행은 화폐발행 비용을 거의 지불하지 않으므로 화폐를 많이 발행할 유인을 가지기 때문에 민간이 화폐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발행한 화폐를 민간이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은행이 언제라도 정화로 태환해 줄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비용이 소요되므로 화폐발행은 제한된다.

결론적으로 개인의 궁극적인 자유를 위해서는 정부의 화폐 발행 독점권을 박탈하고 민간이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화폐제도의 정착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은행법 개정을 검토해야 한다.

참고문헌

Rolnick, Arthur J. and Warren E. Weber, "New Evidence on the Free Banking Era," American Economic Review, December 1983, pp. 1080-91
Rolnick, Arthur J., Bruce D. Smith and Warren E. Weber, "The United States' Experience with State Bank Notes: Lessons for Regulating E-Cash," mimeo., January 1997
Rothbard, Murray N., What Has Government Done to Our Money?, Auburn Alabama, Mises Institute, 1990

김영용(전남대 경제학부, yykim@cho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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