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투표제, 자율적 선택의 대상

김정호 / 2002-11-30 / 조회: 7,515
No.048

1. 집중투표제란?

집중투표제는 주식회사의 이사를 선출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 단순투표제와 대응하는 개념이다. 두 방식간의 차이는 여러 명의 이사를 한 번의 투표로 뽑을 것인가 아니면 한번 투표에 한 명 씩 여러 번의 투표로 뽑을 것인가에 있다. 단순투표제 하에서는 한번의 투표로 한 명 씩의 이사를 뽑는다. 따라서 최대주주가 원하는 사람만이 이사로 선임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집중투표제 하에서는 여러 명의 이사를 한번의 투표로 선출한다. 따라서 최대주주는 여러 명의 후보에게 표를 분산해서 던질 수밖에 없다. 소액주주들이 일부의 후보들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이사로 선출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ABC 주식회사의 최대주주 갑은 갑은 70%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2대 주주인 을은 30%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가 주주총회에서 3명의 이사를 선임하려고 한다. 단순투표제 하에서는 이사 후보를 한 명씩 내세워 3번의 찬반투표를 실시한다. 매번의 투표에서 최대주주인 갑은 과반수의 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선임되는 3명의 이사는 모두 최대주주인 갑이 원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집중투표제를 택하게 되면 3명의 이사가 한 번의 투표로 선출된다. 을이 투표권을 한 명의 후보에게 몰아주는 한, 갑은 어떻게 하더라도 3명의 이사를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선출할 수가 없다. 따라서 3명 중 최소한 1명의 이사는 을이 원하는 사람으로 선임될 것이다. 집중투표제는 이렇게 해서 최대주주가 아닌 주주에게도 이사 선출권을 부여하는 셈이다.
상법 제382조의 2는 의결권 주식을 기준으로 3% 이상을 소유한 주주는 집중투표제의 채택을 회사에 청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회사가 정관으로 이를 배제할 경우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정관으로 집중투표제를 배제한 상장기업은 약 80% 정도다.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은 이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도 배제할 수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이사회의 기능

집중투표제의 의무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이사회가 유명무실하다는 사실이다. 지배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소액주주의 대변자가 이사회에 진출하게 되고 그 결과 유명무실하던 이사회의 기능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개의 회사에 있어서 이사회가 지배주주의 경영방침을 거역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시장에서 기업들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한 이사회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은지는 어떤 생산방식을 쓰는 것이 좋은가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방식이든 이사회의 역할이든 간에 가장 좋고 싼 제품을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사회가 유명무실하다는 것은 우리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독일 등 다른 나라 회사들의 이사회도 우리 나라처럼 평상시에는 최고경영자의 결정을 추인 하는 역할만 한다. 대부분 나라들의 이사회가 유명무실하다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업간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3. 지배주주의 사익추구에 대한 견제 장치

그렇다고 해서 지배주주가 회사의 재산을 제멋대로 쓰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배주주이든 누구이든간에 회사의 경영을 맡았으면 주주 전체의 이익을 추구해야지 자신의 사익만을 추구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런데 이사회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의 장치들이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를 막아 준다. 시장에서의 경쟁압력, 회사법, 사법부 등과 같은 것들이 그런 장치들이다.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무시하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해 보자. 지배주주의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 많을수록 기업의 생산원가가 높아져 시장점유율과 수익률은 떨어질 것이다. 이 회사의 상품은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시장을 잃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주식가격은 떨어질 것이며, 투자자들은 이 회사의 주식을 사지 않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어렵기는 차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사가 잘 안되는 기업에 돈을 선뜻 빌려주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빌려주더라도 부도의 위험을 보상할 만큼 높은 이자나 담보를 요구할 것이다. 이처럼 시장에서 기업들끼리의 치열한 경쟁이 있는 한,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를 착취하는 회사는 도태의 길을 걷게 된다. 지배주주 자신도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원할리 없을 것이다. 즉 시장에서의 경쟁압력이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를 상당 부분 막아줄 수 있다.

사법부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는 사기나 횡령, 배임 등의 죄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징역형이나 벌금형을 받게 된다. 사법부는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를 견제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회사법에 의한 주주평등권이나 매수청구권 같은 장치도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로부터 소액주주의 이익을 보호해 준다. 지배주주가 자신에게 회사의 재산을 분배하기 위해서는 소액주주에게도 소유한 주식의 비율만큼 재산을 분배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주주가 배당, 잔여재산 분배, 의결권의 분배에 있어 소유한 주식의 비율만큼 평등하게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또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무시한 채 합병이나 영업양도 등과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한다면 소액주주는 자기 소유의 주식을 회사에게 사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주평등권과 주식매수청구권 같은 회사법의 조항들은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4. 집중투표제의 득과 실

가. 긍정적 기능
시장에서의 경쟁 압력과 법적인 규제는 상호보완 역할을 한다. 시장에서의 경쟁 압력이 작을수록 법적 규제의 중요성은 커진다. 우리 나라의 상품시장과 자본시장은 상당히 발달해 있다. 반면 아직까지 회사의 경영권을 거래하는 시장은 잘 발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법적 규제는 이것을 메워 주어야 한다.

합병 등의 경영권 거래에서 주식매수청구권이나 차별배당금지 등은 잘 작동한다. 그러나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지배주주들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이 다 막아지고 있다고 불 수는 없다. 특히 사기나 횡령 또는 이와 유사한 행위들에 대해 사법부가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를 이사회에 포함시키는 집중투표제는 지배주주의 은밀한 사익추구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유출시킴으로서, 지배주주의 개인적 이익 추구를 방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집중투표제의 긍정적 효과다. 하지만, 어디에나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집중투표제도 예외는 아니다.

나. 부정적 기능
집중투표제를 통해 소액주주를 대표하는 사람이 이사로 임명될 경우 이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엇갈리게 된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적인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첫째, 이사회가 내린 결정들이 일관성을 잃는 문제가 생긴다. 이사들이 각자 자신을 뽑아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할 경우 그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모순된 의사결정은 회사 재산의 낭비를 가져오며, 결국은 주주 전체가 손해를 보게 된다.

둘째, 회사의 영업비밀과 같은 중요한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를 막기가 어려운 것처럼 소액주주를 포함한 다른 주주들의 사익추구 또한 막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사업들의 채산성은 떨어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주주들 전체의 수익률이 떨어질 것이다.

셋째, 경영권 행사에 따른 이점이 사라지기 때문에 회사의 지배주주가 되려는 인센티브는 감소할 것이며, 2대 주주 또는 3대 주주가 되려는 인센티브는 커질 것이다. 따라서 회사들의 주주 구성은 현재와 같이 주식 소유비율이 현격히 높은 지배주주와 소액주주들로 구성되는 상태로부터 서로 비슷비슷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여러 명의 주주들로 구성되는 상태로 바꾸게 된다. 그로 인해 주주들간의,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사들간의 갈등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집중투표제는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 더 클지는 각각의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선택여부를 기업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좋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자율에 맡겨둘 경우 어떤 경영자도 집중투표제를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집중투표제가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수단이라면 그것을 택하는 기업이 나올 것이다. 지금도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 배제한 기업은 80% 정도나 나머지 20%는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영화된 KT와 한국담배인삼공사는 자발적으로 집중투표제를 택했다. 집중투표제가 좋은 것이라면 이들 기업의 성과가 좋아질 것이고, 그 결과 주가도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기업들 중에서도 상당수 따라하게 될 것이다. 결국 집중투표제가 채택될 것인가의 여부는 투자자들이 집중투표제를 얼마나 원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말만으로 집중투표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투표제를 택한 기업에 돈을 투자한다면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집중투표제를 선택해 갈 것이다.

7. 외국의 사례

필자가 정보를 가지고 있는 21개 나라 중 러시아, 칠레, 멕시코의 3개국만이 집중투표제를 강제로 시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집중투표제가 선택사항이거나 또는 아무런 규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거 집중투표제 논의가 활발했던 미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참고가 된다. 미국의 집중투표제는 1870년에 일리노이州에서 강행규정으로 처음 채택되었다. 그 이후 1880년까지는 7개 州가, 1900년까지는 18개 州가 강행규정으로 채택했다. 1945년에는 37개 州가 강행규정으로, 15개 州가 회사가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임의규정으로 집중투표제를 채택했다. 1950년대 이후 집중투표제를 채택한 주가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매우 작은 수의 기업을 가지고 있는 6개 州만이 집중투표제를 강행규정화하고 있다.

8. 정책 대안

집중투표제는 의무화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각 기업들이 알아서 선택하게 하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고 해서 집중투표제의 본래 목표, 즉 지배주주의 잘못된 행동에 관한 정보를 외부로 유출시키고자 하는 목적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중투표제를 그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목표는 집중투표제가 아니더라도 달성할 수 있다. 내부의 밀고자에 대한 포상제도이다. 벌금이건 또는 손해배상이건 간에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행동과 관련된 사건의 규모는 크다. 그리고 회사 내부의 누군가는 그것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들의 밀고에 대해 벌금이나 손해배상 액수의 일정비율(예를 들어 30%)을 포상한다면 밀고하려는 사람은 항상 있을 것이다. 밀고자에 대한 포상제도는 집중투표제 처럼 영업비밀과 같은 중요한 내부 정보가 유출되거나 모순된 결정이 빈발하거나 지배주주가 되려는 인센티브를 낮추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밀고자에 대한 포상은 집중투표제를 강제로 시행하는 것 보다 효과적인 제도다.

또 시장기능을 진작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대안이다. 상품시장과 자본시장, 그리고 경영권 시장에서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소액주주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성은 작아진다. 각종 규제완화를 통해서 이들 시장의 작동을 더욱 원활히 하는 것, 그것이 집중투표제의 강행규정화 대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참고문헌

김정호, 박양균, 집중투표제의 경제학, 자유기업원, 2000.

김정호(자유기업원 부원장, kch@c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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