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당 16차 전당 대회와 권력 변동: 내용과 전망

오진용 / 2002-11-26 / 조회: 5,124


2002. 11.26
No. 04


I. 江澤民의 정치적 遺産

1. '3個 代表論'과 중국의 현실


중국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목적은 이제까지의 理念과 路線을 재정비하고 최고권력구조를 개편하기 위해서다. 이번 黨대회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江澤民이 자신의 13년 통치를 결산하는 '정치공작보고서'속에 어떤 내용을 담느냐 하는 것과, 또 후임자에게 '어떤 형태로 권력을 인계하느냐' 하는 점이다.
江은 '정치공작보고'를 하면서 매우 경직되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례를 보면, 毛나 鄧도 인쇄된 정치공작보고서를 그대로 읽었다. 그러나 이번에江의 태도는 달랐다. "보고서는 인쇄해서 돌렸으니, 나는 그 요점만 말하겠다"면서 장황하게 13년 동안의 업적을 강연하듯이 설명했다.

江의 연설의 초점은 네 가지였다. 경제발전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 당의 발전을 위해 '3개 대표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 또 反腐敗문제를 힘주어 강조했다.
江은 "어느 누구라도 부패한 자들은 반드시 찾아내어 응징해야 할 것이며, 결연하게 이들을 응징하지 않을 경우 공산당은 스스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江은 대만의 독립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어떤 경우에도 대만을 '하나의 중국'속에 포함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江이 1시간 29분 동안 연설하는 동안 박수소리가 17번이나 울렸다. 사실상 이 연설을 끝으로 江의 시대는 끝났다. 江이 이 '3개 대표론'을 거듭 강조하는 것을 보면, 사실상 이 주장을 자신의 '이념적 指標'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江이 '3개 대표론'을 처음 제기한 것은 2000년 2월 廣東省을 시찰할 때였다. 그런 다음, 2001년 7월 1일 중국공산당 80주년 기념사에서 비로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 후, 당내에서 이 이론에 대한 전국적인 학습운동이 전개됐다. 江의 주장은 명백하다.
개방정책이 가속화함에 따라 사회가 다변화하고, 다양한 소득계층이 등장하면서 중-소 기업가, 선진기업을 움직이는 대 기업가, 문화적으로 선진영역에서 종사하는 자들을 수용해서, 당의 조직기반을 확충해나 갈 때, 당 조직도 건강해 진다는 것이다. 이런 江의 주장의 正當性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중국의 현실을 보면 江의 주장이 단순히 '원칙적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절대적으로 노동자-농민의 당이다. 민영사업가로서 현재 중공당에 입당한 사람들이 36만명 정도로 파악(일설에는 40만명이란 주장도 있음)되고 있는데, 이들은 전체 6천6백만 당원 가운데 0.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 36만명 민간기업가들 중에 95%가 민영사업을 하기 이전에, 이미 장기간 공산당 黨籍을가진자 들이거나, 국가기관을 나와서 민영사업을 경영하면서 黨籍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대부분이 사실상 黨籍을 가진 채 민영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인 것이다. 결국 이들은 사실상 공산당원으로서의 '旣得權'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를 배경으로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인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의 민영사업가들은 대부분 '특수신분의 붉은 자본가'들일 뿐이며, 이들을 흡수함으로서 당원 구조의 '다양화'를 추구한다거나, 경제구조의 다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들을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江의 이 '3개 대표론'은 성숙된 이론을 체계화한 것이 아니며, 너무 성급하고 일방적인 의미가 강한 주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의 민간 기업가들은 이것보다는 헌법개정을 통해서 우선 법적으로 '私有財産을 전면 보장'하는 조치가 시급하다고 보고있다. 사회적으로 '富의 蓄積'이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에 '富者가 된 사람들이 보호받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사회는 아직 민간신분으로 사업을 하기에 매우 열악한 여건을 갖고 있다. 민간기업이 외자기업이나 국영기업과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민간기업이 은행대출, 시장진입, 세수, 토지사용 분야에서 외자기업이나 국영기업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이들을 당원으로 포섭하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라, 민간기업인들이 보다 합리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일과, 먼저 '富의 蓄積의 正當性'을 부여하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2. 권력의 최고 絶頂期에서 퇴진하는 江澤民의 입장


이번 당 대회를 관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江澤民은 스스로 자신의 '퇴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江이 명실공히 鄧小平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최고 권력을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해서 전문가들 사이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5차 당대회(1997)후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집권 13년 동안에 실제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4-5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작년 8월 北戴河회의 이후 16차 당대회를 위한 준비가 시작됐으니까, 江은 이미 그 때부터 사실상 퇴진을 전제로 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고 보면, 결국 최근 4-5년이 江의 권력의 절정기였던 것이다.
江은 15차 당대회를 계기로 上海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정치세력을 대규모 북경으로 끌어들였다. 中共黨史의 긴 눈으로 볼 때, 중국의 최고지도자들 가운데 江은 '派閥'형성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다. 毛나 鄧의 시대에도 누구도 自派세력을 이처럼 광범위하게 부식한 사람이 없었다. 흔히 오늘날 1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한 대부분의 인물, 吳邦國, 黃菊, 曾慶弘등이 上海派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지만 이는 상징적일 뿐이다. 실은 사회과학원을 비롯해서 江이 책임지고 있는 수많은 외교, 대만, 홍콩-마카오, 財政領導小組를 비롯한 많은 당의 '秘線'조직의 대부분을 上海派들로 채웠다.

江은 이렇게 自派들의 세력이 비대해 지자, 두 가지 작업에 착수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地位를 毛나 鄧과 같은 절대적인 위치의 인물들과 같은 '位置'로 격상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그러려면 계속해서 16차 당 대회에서도 당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政治局常務委員 속에 自派세력을 대거 부식할 필요가 있었다. 공산당 국가들의 특징은 권력의 최고'절정기'에 있는 독재자들은 결코 스스로 은퇴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역설적인 주장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江의 은퇴는 비정상적이다. 공산당 국가에서 최고 권력을 장악한지 4-5년만에 그것도 '스스로 퇴진'을 결정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런 점에서, 江의 퇴진은 객관적 여건들, 즉 정치국원의 나이 제한규정, 李鵬-朱鎔基등 동료들의 퇴진, 주변 모두가 '全面退陣'을 권고한 점등이 부득이하게 江을 '밀어냈다'고 봐야 한다. 江은 결국 상황에 ?겨 밀려나면서도 가능하면 그 영향력을 오래 발휘하고 싶어했다. 이 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히 自派세력을 이미 풍성하게 심어 논 상황에서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鄧小平도 뒤에서 垂簾聽政을 한 前例가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江의 생각과, 上海派들의 행동이 바로 그대로 나타난 것이 16차 당대회의 '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II. 畸形的으로 비대해진 '政治局常務委'


중공당의 최고 권력기구는 중앙위원회다. 그런데 중앙위는 일년에 한번 정도 열리므로 중앙위의 핵심은 역시 정치국이 된다. 그러나 정치국 회의는 자주 열리지 않기 때문에, 정치국의 상설기구인 '政治局常務委'가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기구이며 당의 최고 권력기구인 것이다. 이번 당대회 인사개편에서 정치국원 24명 가운데 정치국 상무위원 9명과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승진한 吳儀를 제외하고 나머지 14명은 모두 신인이었다. 특히 국무원에서 2명(吳儀, 曾培炎)과 군부에서 추천된 2명(郭伯雄, 曹剛川)을 제외하고는 10명 모두가 지방간부 출신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지방에서 정치적 업적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점,
-파벌적인 색채가 거의 없는 점,
-대부분이 淸廉하고 대인관계가 복잡하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총서기 胡와 총리 溫家寶가 정치국을 움직이는데 유리한 점이다. 어느 정도 上海派를 견제할 수 있는 균형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政治局常務委'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政治局常務委'는 매주 목요일 한번 열린다. 정치국 상무위는 모든 의안을 투표에 의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정치국 상무위원은 홀수인 7人制로 구성돼 있다. 찬-반이 同數일 때는 의장인 總書記가 캐스팅 보드를 행사하도록 되어 있다. 원래 이번 당 대회에서는 胡錦濤를 제외하고 江을 비롯해 朱鎔基 李鵬 李瑞環 李嵐淸 尉健行은 모두 물러나도록 되어있다. 정치국원의 은퇴 년령을 70세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朱總理는 일찍부터 연임을 포기를 선언했다. 李瑞環은 금년 68세이므로 선임이 가능한 나이지만, 본인이 은퇴를 고집했다. 역사상 이렇게 세대교체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예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 당 대회에서는 '政治局常務委'가 7인에서 9인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江의 권력팽창이 최고조에 달해 있으며, 江의 강력한 요구가 그대로 현실에 반영됐기 때문이다. 1956년 8차 당 대회에서 최초의 정치국상무위가 설치됐을 당시는 6人制였다. 이것이 문화대혁명 직전에는 11명으로 늘어났다. 文革중에 개최된 9차 당 대회에서는 처음에는 5人制였다가 차츰 늘어나 9人制가 됐다. 그 후, 1977년 11차 당 대회 이후에는 계속 7人制가 정착돼 왔는데, 그 이유는 권력의 안정과 균형을 고려해서 그 숫자가 이상적이라고 평가됐기 때문이다. 결국 25년 만에 다시 9人制로 확대된 것이다. 여기에 많은 정치적 의미가 숨겨있다.

이처럼 당내 최고 권력기구의 팽창과 축소의 '起伏'속에는 바로 일시적으로 어느 일부 系派의 급속한 세력확대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文革과 같은 비상시기에 11명까지 그 수가 폭증한 배경에는 극좌파 세력의 대거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번에 7人制에서 9人制로 바뀐 것도 上海派의 세력팽창이 그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번 당대회에서 胡錦濤를 제외하고 吳邦國 溫家寶 賈慶林 曾慶紅 黃菊 吳官正 羅幹등 8명은 모두 정치국원에서 승진한 케이스다. 그 중에서 吳邦國과 賈-曾-黃은 이미 공개적으로 알려진 上海派들이며 총서기 胡를 제외한 8명 가운데 4명으로서 과반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吳官正 李長春도 사실상 江이 지방에서 발탁해서 중앙으로 끌어올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江의 인맥으로 간주한다면, 江의 세력이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고, 또 그런 이유 때문에 江이 은퇴하고 나서도 垂簾聽政이 가능한 체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9人制의 등장에는 江의 세력확장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으며, 上海派의 과대한 정치국상무위 진출이 '組織이 肥大해진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政治局常務委'의 9人의 특징을 보면:
첫째, 대부분이 江의 지지를 받거나 江의 천거에 의해서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한 인물들이라는 점, 江과는 불가분한 因果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고, 江의 13년 통치가 중국정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지방당의 관리자로서 그 재능을 인정받은 자들로서 現實을 중시하며 나름대로 매우 實利的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이들은 黨僚나 官僚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이들은 '軍隊보다도 더 命令중심적인 공산당시스템'속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며, 지방색이나 학벌의 색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파벌을 짓거나 집단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중국의 대학에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과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들의 대학시절 전공이水利工程學科(胡), 地質鑛山學科(溫), 無線電子學科(吳邦國)출신이라고 해서, 일괄해서 '테크노크라트'라고 보는 것은 평면적인 관찰이다.


III. '第4世代의 核心: 胡錦濤 溫家寶 曾慶紅


중공당은 集團指導체제를 지향한다. 정치국상무위 9人制하에서도 제4세대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그룹이 있다. 이는 제3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江澤民 朱鎔基 李鵬 세 사람의 핵심이 존재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제4세대의 핵심으로는 胡와 溫家寶 曾慶紅 세 사람이다. 이들은 胡를 중심으로 세 사람이 '共同責任을 지는 集團指導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 3人간에는 이미 역할분담이 정해져 있다. 胡는 당과 국가의 대표자로서 당-정-군을 일괄지도하면서 동시에 국가를 대표해서 국제적인 외교활동에 나서게 될 것이다. 특히 과거와는 달리 중국이 새로 浮上하는 한 세력으로서 역할이 중시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胡의 리더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溫은 국무원 총리로서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원만히 이끌어 나가야 한다. 溫은 특히 지방정부를 확실히 장악해서 중앙의 획일적인 지도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曾는 당내 광범위한 일상업무를 관장하고 특히 당의 조직관리와, 당 차원의 대외관계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중국-북한관계는 전통적으로 당 차원의 외교관계를 중시해왔기 때문에, 대북한 관계에서 曾의 역할은 매우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1. 胡錦濤의 '리더쉽'의 특징


총서기로서 胡는 일찍부터 江澤民의 후계자로서 알려진 인물이기는 하지만, 실제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특히 胡의 리더쉽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서방에서는 큰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청장년 시절 胡는 주로 청년단 활동에 전념했다. 그 후, 43세 때인 1985년 7월 貴州省 당 서기를 했다. 가장 젊은 省黨 書記였다. 1988년 12월에는 자리를 옮겨 티베트 자치구 당 서기를 담당했다. 지도자로서 胡의 능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이들 지방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胡는 '작은 周恩來'라고 부를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9년 초, 胡가 티베트 자치구 당 서기로 부임한지 얼마 안돼서 티베트의 독립 운동자들의 시위가 격렬해지고, 독립요구가 폭력화할 기미가 보이자 胡는 즉시 중앙당에 '대처방안'을 지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중앙당에서는 시간을 끌면서도 적절한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망서렸다. 이 때 胡는 더 이상 중앙당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독립을 외치는 티베트인들의 시위를 군대를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사건에서 胡는 대담하고 과단성 있는 지도자로서의 행동을 여지없이 과시했는데, 鄧小平은 이런 胡의 결단력 있는 조치를 극찬했고, 당내에서 胡의 명망은 한층 광범위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胡는 전형적으로 外柔內剛한 인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온유한 표정과 신중한 태도 때문에, '나약한 귀공자'같은 인상을 받지만, 실제 危機에 대처하는 능력은 치밀하고 대담하며, 어떤 경우에도 失機하지 않는 적극성을 갖고 있다. 티베트의 독립시위에 대한 胡의 진압방식은 얼마 후 일어난 6.4 천안문 사태의 해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鄧小平이 학생시위를 과감하게 일거에 진압한 것도 胡가 취한 조치와 너무나 유사했다.

胡의 위기대처 능력은 최근 미-중 정찰기 충돌사건에서도 다시 한번 再演되었다. 미국의 정찰기와 중국의 전투기가 충돌한 다음, 미국 정찰기가 海南島에 착륙하자 미-중간에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됐고, 자칫 잘못처리 하면 양국관계에 커다란 큰 분쟁으로 발전할 소지도 있었다. 江澤民은 고민 끝에 이 사건을 胡가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胡는 즉시 전문'대응'팀을 조직하고 해결에 착수했다. 胡는 이 사건처리를 위한 원칙을 정했는데, 먼저 어느 쪽의 과실인지를 밝힐 것, 정찰기와 비행사는 사건처리 즉시 반환할 것, 미국의 과실이 밝혀질 경우 사과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胡는 이 사건에서 양국 비행기의 충돌'角度'와 비행상황을 증명하는 자료를 가지고 미국측의 과실을 밝혀냈고, 결국 미국으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받아냈다. 이 사건에서 胡는 중국인의 自尊心을 한껏 치켜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깨끗하고 간결하게 해결함으로서 자신의 指導力을 다시 한번 국내외에 과시했다. 미국은 胡가 이 사건을 지휘하는 동안 호기심 있게 胡를 관찰했고, 사건이 무리 없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딕 체니 부통령 이름으로 胡를 초청했다. 이것이 胡가 금년 4월말 미국을 방문하게 된 배경이었다.


2. 溫家寶가 총리가 되는 이유


현재 국무원 내에서 溫의 서열은 제1부총리이며, 당내 직책은 국무원 및 국무원 직속기관 담당 書記다. 당 조직상으로는 국무원을 직접 지휘하는 서기임으로 사실상 당 차원에서는 溫이 국무원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외부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서열상으로 溫이 총리를 승계 하는 것에 대해서 중국내부에서는 전혀 이견이 없다. 溫은 이미 9월부터 shadow cabinet을 조직하고 사실상 朱鎔基총리 정부로부터 정권을 인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부의 각 부처를 인수할 부장(장관)들도 사실상 이미 내부적으로는 정해져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년 3월 전국 인민대표대회에서 정식 선출되기 반년 전부터 총리업무를 인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溫은 중공당내에서 잔잔한 '故事'가 많은 사람이다. 그만큼 풍부한 인간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원칙을 흐트리지 않고 행동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溫의 생활신조 중에는 '조직속에 살면서 인간관계에 억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溫의 이런 청결하고 소박한 생활태도는 당내에서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다.

이런 溫의 생활신조는 그의 경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개혁-개방정책이 시련을 겪는 시기에 溫은 胡耀邦 趙紫陽 江澤民 세 총서기 밑에서 계속 당 중앙 辦公廳(당사무총장)主任을 맡아했을 정도다. 각기 다른 정치적 배경과 성격적으로 전혀 다른 세 사람의 총서기로부터 신임을 받는다는 것은 溫의 일 처리와 처신하는 태도가 그만큼 투명하고 신중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溫도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금년 2월에 일어났다. 2월 9일 당내 金融工作會議에서 溫이 江澤民으로부터 "(금융-농업분야)업무추진 능력이 부족하다"는 공개적인 비판을 받은 다음, 溫이 즉시 '정치국상무위에 사표를 제출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홍콩의 한 잡지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대만과 일본의 신문들도 연이어 대서특필했는데, 이는 16차 당 대회 권력구조 개편과 관련된 미묘한 사안이어서 큰 관심을 끌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溫을 정치적으로 흔들어 보려는 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 후, 溫이 제출한 辭表는 결국 정치국상무위의 정식 안건으로 올라가서 표결에 부쳐져서 반대 4표, 기권 3표로 溫의 사임 안건은 통과되지 않았고 사표는 반려됐다. 이 표결에서 나타난 결과를 보면, 溫의 반대파들은 溫의 제거하려고 시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기권표를 던진 것이며, 이는 당내 최고 지도자들의 溫에 대한 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3. 曾慶紅은 누구인가


曾慶紅에 대한 중국사회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다. 이는 曾이 어느 누구와도 다른 점이다. 曾은 대표적인 혁명원로 曾山의 아들, 1984-85년 동안 上海市 당 조직부장을 하면서 江澤民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며 정치적으로 급성장했다. 1989년 江이 趙紫陽의 뒤를 이어서 총서기가 되자 江은 즉시 曾을 北京으로 불러들여 당 중앙 판공청 부주임-주임을 시켰다. 15차 당 대회(1997)에서는 무려 세 단계를 뛰어올라 중앙위원, 정치국 후보위원, 서기처 서기가 됐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벼락치기 출세에 속한다. 曾의 이런 승진 뒤에는 江澤民의 강력한 지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후 중국사회에서 曾의 행적을 바로 '江의 그림자'처럼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曾의 정치적 급성장은 당내에서 많은 저항세력을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康生같은 놈"(康生은 惡魔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毛의 정보관계 책임자. 수십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킴)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꾀주머니"라는 별명도 있다. 이번 당 대회에서도 曾는 다시 두 단계를 뛰어 올라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고, 胡와 溫과 함께 제4세대를 대표하는 3人의 핵심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江澤民의 무리하리만큼 적극적인 支持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앞으로 胡-溫-曾 3人體制에서 曾는 전적으로 黨務를 총괄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당 중앙 서기처의 서기로서 曾은 조직-인사-통일전선-국제연락-대만문제를 총괄하고 있다. 앞으로 曾이 어떻게 胡-溫체제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으로 자신의 領域을 개척해 나 갈 것인가'는 중국 내에서도 큰 관심을 끄는 화제가 되고 있다.


IV. 평가와 전망


1. 평가


16차 전당대회는 胡錦濤를 비롯한 제4세대의 정치세력들이 중국정치의 정면에 등장하는 대회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를 비롯한 政治局, 政治局常務委의 권력구조를 보면 江의 친위세력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당 최고권력기구 속에 上海派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함으로서, 제4세대의 본격적인 浮上에 커다란 障碍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당의 최고권력이 江의 쪽으로 지나치게 '傾斜'됐다는 것은 당내 정치의 '均衡'이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정치안정을 위해서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런 경우는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文革과정에서 또 文革을 최종적으로 수습한 군대들이 대거 당내 최고 권력기구를 점령함으로서 중국정치가 군부의 손에 좌지-우좌지 됐던 시기가 있었다. 또 '4人幇'이 중국정치를 독점했던 시기도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하다. 그 때마다 중국은 원상회복을 하는데 장시간에 걸쳐 많은 代價를 치뤄야 했다.

이번에도 江澤民과 그 支持세력들은 江을 毛나 鄧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의 지위로 '格上'시키기 위해서, 江이 黨밖에서도 계속 垂簾聽政하는 체제의 구축을 시도해 왔는데, 그 정도가 은퇴하는 朱鎔基 李鵬 李瑞環의 불만을 살 정도로 '분수'를 넘어서고 있다. 이 점은 중국정치에서 反時代的(counterclockwise)인 현상이다. 중국정치에서 지나친 '獨占은 곧 不幸을 낳는다'는 것은 中共黨史에서도 이미 상식처럼 돼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전당대회 개막일 날, 主席團에 앉은 朱鎔基와 李鵬의 얼굴은 굳게 경직돼 있었다. 중국정치의 중요한 원칙, 즉 제3세대의 핵심 세 사람이 동시 퇴진하는 시점에서, '집단지도체제'의 의미가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을 홍콩의 '明報'는 매우 섬세하게 현장보도를 하고 있다.(保持距離 突顯江澤民地位, 明報, 2002.11.9,A2)

그런 점에서, 16차 당 대회는 '떠오르는 胡와 溫의 세력'과 '半退한 입장에서도 계속 권력을 장악하려는 江의 세력'간의 충돌이 굉장했던 대회로 기록될 것이다. 여기서 胡와 溫이 크게 밀린 것은 사실이다. 이제까지의 旣得權을 내세워 총력전을 펼친 上海派의 득세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아마, 앞으로 총서기로서 胡는 내면적으로 江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曾慶紅-黃菊-吳邦國-賈慶林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과거 江澤民이 鄧小平의 밑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세계를 구축하는데 무려 7-8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처럼, 胡 역시 3-5년은 굴욕적인 시간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상 胡는 10년의 정해진 집권기간을 갖고 있는데, 전반기 5년은 그렇게 보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16차 당 대회이후 중국정치는 글자 그대로 '胡와 江의 同居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同居시대가 얼마나 계속될지, 시간의 싸움에서는 胡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본다.


2. 展望


정치안정은 輸出과 內需擴大에 달려 있다. 14차 전당대회(1992)이후, 중국정치의 특징 중에 하나는 당내투쟁이 내부경제정책이나, 대외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중공당내에서 누구나 개혁-개방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고, 경제의지속적인 성장이 없이는 정치 사회적 安定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당 대회에서는 중국경제발전의 장기적인 비전도 제시됐다. 2020년 내에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2만4천홍콩달러)달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 때쯤이면 전체 국민이 '小康'社會(최소한 衣-食-住등 기본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금년 중국의 수입은 6천억달러, 1990년 대비 4배나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2020년의 교역규모를 2조달러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 지금까지 30년 이상 고도성장을 구가한 나라는 미-일 정도다. 아마 중국이 2020년까지 40년이상 고도성장을 달성한다면 특별한 예에 속할 것이다.
중국이 계속해서 고도성장을 유지하려면, 수출시장과 내수경기를 효과적으로 살려나가야 한다. 특히 아직도 다양한 所有制度하에서 全民所有制 부분인 국영기업의 비중이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재정정책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적자재정이 계속되는 상황 하에서도 확대재정정책을 계속할 것이다.
-외국인 투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유치할 것이다.
-고용창출을 위한 노력을 배가할 것이다.(전국의 실업자 1400만-2800만, 사회노동인구의 7-14%로 평가)
-수출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기술력 향상에 전력을 다한다.
-소득구조 개선과 시장 내 경쟁을 유도하여 내수시장을 더욱 확대한다.


중국경제는 수출증가와 내수시장의 지속적인 확대에 달려있고, 동시에 이 점은 정치안정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안정적인 국제환경이 절대로 필요하고 특히 미국과 협조적인 관계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있다. 胡錦濤시대에도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유지는 중국외교의 중요한 '목표'가 될 것이다. 지난 10월 25일 텍사스 부시 목장의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한반도문제'가 중심 화제였다. 한반도문제와 관련해서 미-중 관계가 다시 1979년-1983년 시기와 같은 '蜜月'관계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世代交替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번 당 대회에서 선출된 198명 중앙위원과 158명 중앙후보위원의 대부분이 1945년 이후 출생한 사람들이다. 평균 년령 55세, 1997년에 비해 半年이 젊어졌다. 98%가 대졸학력, 이 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5세대로서 다음 당 대회에서 집권이 가능한 나이다. 예를 들면 중공 중앙 연구실 王寧은 1955年生인데 이번에 중앙위원에 피선됐다. 上海市 副書記로있는 韓正도 중앙위원이 피선됐는데, 아마 韓이 현재의 陳良宇시장의 뒤를 이어 市長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번에서부터 나타나는 특징은 단순히 나이가 젊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조직에서도 업무의 一貫性과 經驗交換을 위해서 靑-壯年층이 서로 긴밀히 교체하는 형식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중국의 세대교체가 단순한 '高齡者의 교체'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2002년 16차 당 대회 이전에 국무원의 각 부서는 세 단계의 世代交替그룹을 이미 형성해 놓고 있었다. 예를 들면, 財政部는 이미 첫 번째 세대교체 대상으로서 部長 項懷誠 (63세), 부부장 張佑才(60세), 金蓮淑(60세), 高强(58세)을 정해 놓고 있다. 또 두 번째는 세대교체 대상도 副部長 金立群(52세), 樓繼偉(51세), 朱志剛(51세)으로 정해져 있다. 세 번째 세대교체 대상은 副部長 蕭捷(44세), 部長助理 李勇(50세), 廖曉軍(50세), 馮淑萍(50세)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중요 간부들이 층층이 '준비된 세대교체'대열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사실을 강조한다. 조직의 계획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V.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


중국에서 胡錦濤를 비롯한 제4세대의 등장이 과거와 비교되는 특징은 '차거운 理性的 世代'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들은 과거와는 달리 이데올로기나, 사회주의적 '國際主義, 혹은 역사적 紐帶感도 중요시하지 않는다. 냉정한 현실적인 '이해관계'만이 이들이 중시하는 價値인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중국의 국제관계는 어떤 地緣 政治的 요인보다는 국가'이익'을 더욱 최우선시 하는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최근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중국의 對美관계가 매우 극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 배경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들 제4세대들은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지만, 먼 장래를 위해서 오늘의 '現實'과 바꾸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앞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對 中國 관계는 상호 '국가적 이해'관계를 어떻게 進展시켜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상호관계의 '面과 幅의 크기'가 바로 중국과의 관계를 격상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경제적 大國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등장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시 한번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直視할 때가 되었다. 한-중관계는 급신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한-중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일 관계, 한-미 관계를 어떻게 지금보다 더 '유기적인 경제협력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느냐 하는 점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課題다.


吳鎭龍(經博 北韓硏究所 硏究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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