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지식권력이 움직인다]<1>서재를 박차고 나온 지식

김정호 / 2003-10-01 / 조회: 11,779       동아일보,@


《‘지식권력’이 움직이고 있다. 1980년대 말 공산권 붕괴 이후 지향점을 잃고 침체돼 있던 지식인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다시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참여 양상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국가 정책에 실천적으로 반영시키면서, 지식을 ‘사회화’하기 위해 집단을 결성해 활발히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사회의 각종 문제에 대처하고, 장단기 정부 정책 수립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집단화해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식권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비판과 대안을 활발하게 내놓고 있는 주요 ‘지식권력’ 집단들의 주장과 관심사, 그리고 참여 인사들의 특성을 분석하는 기획을 마련한다.
각 ‘지식권력’ 집단이 공개적인 장에서 여타 집단들과 함께 한국사회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건설적으로 상호 비판 및 협력하는 장을 마련하려는 바람에서다. 제1회 총론에 이어 매주 월요일 ‘지식권력’ 집단을 하나씩 분석해나간다. 》

▽지식권력의 시대=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현실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펼쳐줄 정치가를 찾아 천하를 돌아다녔던 공자(孔子) 이래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공론의 장이 마련되지 못했던 과거 군사정권 시기에 지식인들은 집권자에 의해 ‘간택’되어 자신의 전문지식을 체제 내에서 펼쳐 볼 기회를 갖든가, 아니면 반독재 투쟁에 나서서 체제 밖의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지식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갖고 발언하기 시작했고, 특히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재야의 시민운동 영역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지식인들이 직접 정권에 참여했다. 한편 이들과 뜻을 달리하는 지식인들은 재야에서 또 다른 지식권력 집단을 형성해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함께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하고 검증하며 새로운 정권 창출에 참여하기도 하고, 비판하거나 정책대안을 제시하며 한국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념적 분류 기준=색깔논쟁의 상처가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 지식인 집단의 이념적 성향을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흔히 ‘좌-우’라는 기준을 사용하지만 군사정권의 시기에는 자신의 성향이 좌파라는 것을 드러낼 수 없어 좌파의 대부분이 중도를 자처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과거 군사정권에 참여했던 우파 지식인들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도리어 우파적 지식인들이 중도를 자처하는 상황이 됐다. 양측의 상호 비난 속에서 ‘좌파’는 ‘빨갱이’와 혼동되고 ‘우파’는 ‘수구’와 혼동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좌-우’의 기준은 이념적 성향을 분류하는 가장 보편적인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어느 사회에서나 ‘좌-우’의 기준은 상대적이라는 점에서 분류의 어려움은 여전히 남는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센 흐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하는 것도 최근 지식인 집단의 성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이 때문에 좌우의 축 외에 세계주의와 민족주의를 또 하나의 축으로 설정했다. 이때 민족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 문화적 다양성과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념분포의 특징=지나친 도식화의 위험은 있지만 지식권력 집단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위해 분포도를 통해 이념적 성향을 분류하는 것은 ‘필요악’이다. 논란이 많을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분포도를 그리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기획이 진행되면서 좀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성향의 분류가 가능해질 것이다. 일단 지식권력의 동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대표적 집단 14개를 선정해 분류했다.

분포도를 보면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민족주의적 우파의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대체로 보수적인 인문학회나 사회단체들이 들어가야 할 자리다. 그러나 이 기획에서 규정한 ‘지식권력’ 개념에는 맞지 않아 제외됐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센 물결이 특히 우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우선 이념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집단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전위를 자처하는 ‘자유기업원’(원장 직무대행 김정호), 전경련의 입장을 지지해 온 ‘한국경제연구원’(원장 좌승희),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안연대회의’(정책기획단장 이찬근), 진보적 입장에서 문화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문화연대’(상임대표 김정헌) 등이 있다.

한편 1989년부터 시민운동에 불을 지펴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이종훈)과 소액주주운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참여연대’(공동대표 박상증), 중도 우파의 입장에서 이슈를 제기하며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는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공동대표 김석준) 등은 지식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활발하게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는 집단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들 시민운동 단체에서 시민운동의 방향을 주도하며 활동 중인 지식인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실무 경험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이 참여해 싱크탱크의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안민정책포럼’(회장 장오현)도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지식권력이다. 현 정부에 주요 인사들이 참여해 주목받고 있는 ‘대구사회연구소’(소장 김형기)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인권문제에 관해 관심을 확장하고 있는 ‘5·18연구소’(소장 송정민)는 지역의 특색을 살려 해당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지식인 집단이다.

이 밖에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소장 채만수)는 노동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이 모인 집단이고,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소장 권영근)는 농어촌 문제 관련 전문가들의 산실이다.
여성과 환경 분야는 다양한 성향의 집단들이 활동하고 있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다양한 여성운동단체들의 모임으로 여성운동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는 ‘한국여성단체연합’(공동대표 정현백)과 최근 새만금 개발 문제라는 현안을 놓고 환경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새만금 생명학회’(회장 이시재)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분석할 계획이다.

▼‘지식권력’이란 무엇인가▼

‘지식’과 ‘권력’의 부적절한 결합을 여러 차례 경험해온 한국사회에서 ‘지식권력’이란 개념은 상당한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식인들의 전문적 ‘지식’이 집권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고, 집권자들을 등에 업고 형성된 일부 지식인 집단이 부당한 물리적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쇄와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어 지식은 대중화됐고 권력 분산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투여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전문지식은 여전히 소수의 직업적 지식인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전문지식이 현실사회에서 구현되기 위해선 정치권력을 필요로 하고, 정치권력 역시 효율적 통치와 권력 유지를 위해 전문지식을 필요로 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런 지식인들의 부정적 영향력을 경계하며 ‘지식권력’에 주목하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지식인’의 영향력 행사는 직접 물리적 권력을 가진 집권자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지거나, 혹은 반대로 이런 물리적 권력에 저항함으로써 대중의 힘을 통해 반사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상당수 지식인들이 사회 각계에서 집단을 형성해 정책 대안을 모색하고 이를 국가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움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 자기의 뜻에 따라 타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직간접적 힘을 권력이라고 할 때 ‘지식’이 직접 ‘권력’이라는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사회화’하려는 지식인들이 정치권력에 기생하지 않고 동반자 또는 견제자로 권력과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형성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를 통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확대됐고 경제발전을 통해 독립적인 물질적 토대가 어느 정도 갖춰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각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들이 사회의 여타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 긴장관계를 이루며 공존할 때 사회는 이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 논의를 거쳐 발전할 것이다.

이들은 각기 독립적인 ‘권력’으로 존재하면서 뜻이 맞는 다른 권력을 만나면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때로는 직접 참여해 지식을 현실에 적용한다. 뜻이 다른 권력을 만나면 견제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장기적인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도움말 주신 분들▼

강내희(문화연대 집행위원장·중앙대 교수·영문학)
김석준(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이화여대 교수·행적학)
김정호(자유기업원 원장 직무대행·경제학)
김호기(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연세대 교수·사회학)
장오현(안민포럼 회장·동국대 교수·경제학)
조원희(대안연대회의 사무국장·국민대 교수·경제학)(가나다순)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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