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고뇌할 자유

김범수 / 2024-05-10 / 조회: 152

나는 말년 병장이다.


누구든 ‘말년’에는 잡념에 휩싸인다. 정년이 다가오는 중년의 직장인, 재계약을 앞둔 비정규직 노동자, 졸업을 앞둔 대학생까지. 말년은 매일이 익숙해진 한 자유인에게 사색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선사한다. 고민하는 양상은 대개 비슷하다. “뭐 해먹고 살지?”


나는 대학 학보사에서 3년 동안 일했다. 그곳에서 언론인의 꿈을 키웠다. 세상과, 사회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기자’라는 직업, 멋지지 않은가! 그러다 조금 늦게 군에 입대했다. 생각은 사치였던 일병·상병 시절을 벗어나 어느새 병장이 됐다. 생각이 많아졌다. 쏟아지는 졸음을 헤치고 당직을 서던 어느 새벽,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꼭 기자가 되어야만 할까?”


중등 사회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언론인이 아니더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직업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경제와 정치 과목을 좋아했고, 우연히 경험한 교육봉사가 생각 외로 적성에 맞았다. 수험생 시절을 챙겨준 존경스러운 은사님 생각도 났다. 물론 ‘언론고시’라 불리는 좁은 바늘 틈을 뚫기 두렵다는 이유도 없지 않았다.


거의 모든 청년은 나처럼 진로를 고민한다. 사뭇 괴로운 과정이다. 불경기에 취업난이 기본값으로 되어버린 탓이다. 주변에는 벌써 공무원이 된 친구도 있고, 명문대 공학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녀석도 있다. 대학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워 일찌감치 큰돈을 벌고 있는 친구도 있다. 반면 변변찮은 대학에 정치학이라는 실용과 동떨어진 학문을 배우는 나는 고민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한 가지 위안인 점은, 이렇게 ‘진로를 고민하는 나’의 모습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라는 믿음이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는 자유의지를 가진 시민들의 자발적인 직업선택을 그 근원으로 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능력과 선호에 따라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높은 임금으로 직업적 희소가치가 높은 공학자는 기술혁신의 원천이 되어 기업과 국가 경제를 떠받친다. 마찬가지로 의사를 향한 사회적 명예와 부는 시민들이 받는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의 배경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 고학력·지식산업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선호되지 않는 3D직종 극한직업에는 높은 보수가 책정돼 공급을 조절한다. 결국 시민들의 자유로운 직업 선택은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마법 같은 일이다. 계획경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직업 선택을 제한하는 계획경제는 전 사회의 합리적 계획을 종말시킨다. 자유로운 국가에 비해 사회수준 전반이 낮아진다. 기술혁신이 늦춰지고 의료서비스 등 사회 인프라가 최적화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다. “자유에 대한 두려움.” 우리 사회 ‘말년’들이 흔히 겪는, 말년 병장인 내가 느끼는 미래와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다. 개인의 두려움을 사회가 책임져주겠다는 달콤한 말에서부터 자유와 책임의 가치는 훼손된다.


영국의 사회주의를 치료한 마거릿 대처 총리 말했다. “사회주의자들이 호소해도, 그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불평등해질 권리를 갖는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자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계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사람은 없다. 추구하는 가치도 다르다. 누군가는 돈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또 누군가에겐 명예가 우선이다. 공학도와 인문학도, 노동자와 의사는 모두 각자의 최우선 가치를 준칙삼아 직업을 선택하며, 이를 토대로 사회적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경제적 발전은 이루어진다.


나는 아직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 언론사 입사 시험을 치를지, 임용시험을 치를지. 치열하고 때론 고통스러운 생각의 나날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할 수도, 또 취업준비로 수년을 땅에 허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이다. 이는 우리가 책임 있는 존재이며 때론 잘못된 결정으로 인한 결과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책임감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지만, 이것이 우리가 지키는 자유의 가치다.


얼마 전 대대장과 전역 전 차담을 나눴다. “고민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학 졸업하면 뭐 해먹고 살지 고민”이라고 답했다. 인생 선배로서 앞길에 대한 조언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그건 대대장도 마찬가지야, 자네만큼은 아니겠지만. 평생 안고 갈 고민인 것 같아. 그런데 그래야 인생에 발전이 있는 거지.”


10년 후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 본다. 미래를 향한 희망찬 상상, 그리고 상상에 다다르려는 각고의 노력, 이것이 자유의 ‘참맛’이자 우리 사회와 경제를 지탱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아닐까. 내 몸은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말년의 ‘고뇌할 자유’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나는 대한민국 육군 말년 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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