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선택한 신격호, 김일성을 선택한 조총련 - 재일 한인 사업가들의 엇갈린 운명

김정호 / 2020-03-17 / 조회: 7,342


김정호_2020-03.pdf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0FIvBkL_so0&t=49s


2020년 1월 19일, 롯데그룹 창업자인 신격호 회장이 타계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신격호 회장님의 별세는 1세대 재일 한인 사업가 세대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격호 회장을 비롯한 재일교포 사업가들의 모국 투자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일단 신격호 회장 이야기부터 해야겠죠. 이분은 1921년생, 그러니까 99세에 돌아가신 거죠. 울주군 출생인데 20살 되던 1941년에 일본으로 건너 갑니다.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워서 일본으로 갔다고 해요. 뭐 좀 해보려 하면 마을 어른들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핀잔주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일본 가서 우여곡절 끝에 껌과 초콜릿 등을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롯데제과는 그렇게 일본에서 창업했고 성공을 거뒀습니다.



당시 돈 좀 번 재일 한인 사업가들은 조국에 투자하고 싶어했지요. 그런데 어떤 조국이냐는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투자하고 싶어했지요. 하지만 남한에 투자를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신격호는 남한을 선택한 대표적 사업가지요. 원래는 일관종합제철소를 만들려고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는데요. 박대통령도 신격호에게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제철소는 국영으로 추진하기로 방침을 바꾸자 신격호는 준비한 모든 자료를 박태준에게 넘겨줍니다. 그것이 포항제철이지요. 그 대신 신격호 본인은 제과업으로 진출합니다. 1967년 한국 롯데제과의 출발입니다.


제과업도 고국으로의 진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국은 제과업계는 이미 해태제과, 동양제과 같은 기존 업체들이 꽉 장악하고 있었죠. 신격호의 승부수는 직배 방식의 유통이었습니다. 기존 제과업체는 대리점 방식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즉 유통을 제3자에게 맡기고 있었던 거죠. 신격호의 롯데는 대리점이 아니라 직접 트럭과 영업사원을 갖추고 동네 가게들을 직접 공략합니다. 그 전략이 통했고 롯데제과는 제과업계 메이저로 올라설 수 있었죠.


1970년대 초 그런 신격호에게 박대통령은 다시 국제적 수준의 특급관광호텔을 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시는 국빈을 대접할 마땅한 호텔도 없었던 거죠. 롯데호텔은 1973년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롯데호텔들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신격호 회장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한국형 면세점입니다. 원래 면세점이란 공항에서 여행객들에게 술이나 담배 같은 것을 파는 사업이었죠. 이것을 시내의 명품 쇼핑 컨셉으로 바꾼 주역이 롯데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면세점 이야기>라는 책을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신격호의 평생 소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랜드마크를 세우는 것이었는데요. 잠실에 롯데타워를 지어서 그 소원을 이뤘습니다. 이제 그 거인이 떠났군요.


신격호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재일교포 사업가들이 한국 경제성장에 기여했습니다. 구로공단에 투자한 사업가들이 대표적입니다. 구로공단은 1960년대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적 수출상품들을 생산해 내던 곳입니다.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가 되었죠.


구로공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코오롱그룹의 이원만회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모자를 만들어 팔아서 제법 큰 돈을 번 사업가인데요. 한국에 돌아와서 대구에 한국나이론이라는 공장을 만들어 운영 중이었습니다. 이원만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가공단을 만들어 재일교포 사업가를 유치하자고 건의를 합니다. 대통령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구로동의 국유지에다가 공단을 조성했습니다.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장이 된 이원만은 일본의 재일교포 사업가들을 찾아 다니며 고국에의 투자를 설득했죠. 물론 이원만도 구로공단에 한국나이론의 새로운 공장을 짓게 되죠.


공단 준공 당시 입주기업은 총 29개였는데 재일동포기업이 18개였습니다. 그 후로도 입주 기업의 70% 정도가 재일교포 기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돈만 투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로공단에 입주한 전기와 전자, 화학, 철강, 유압 등이 당시로서는 첨단 업종이었는데요. 그 기술자들은 재일교포가 대부분이었죠. 포항제철과 기아자동차를 설립할 때도 핵심기술자들은 재일교포였다고 합니다.


구로공단이 성공을 거두자 마산수출자유지역, 구미공단으로 이어지게 되죠. 구미공단에 투자한 대표적 사업가는 한국도시바의 곽태석 사장입니다.


이희건이라는 재일교포 사업가는 오사카 교민 340명의 투자금을 모아 1982년 한국에 본격적인 민간은행을 설립하죠. 신한은행입니다.


한국에 투자해주신 재일교포 사업가들, 고마운 분들입니다. 한국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본인들에게도 한국에의 투자는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북한편에 섰습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일본공산당이 재일교포 편을 많이 들어줘서 공산당과 가까운 교포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19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 경제가 남한 경제보다 나은 측면이 꽤 있었죠. 이래저래 박정희 대통령보다는 김일성을 좋아하는 교포들이 더 많았던 겁니다.


조총련계 사업가들은 1960년대부터 애국공장이라는 이름으로 공장을 헌납했습니다. 아래의 표가 애국공장들의 리스트인데요. 많지요? 조총련상공회장 전연식-전진식 형제가 헌납한 애국정미공장, 오사카 지역상공회 부이사장 김상규가 헌납한 평양맥주공장, 시즈오카 상공회 부회장 최영빈이 헌납한 모란종합식료공장, 니이카타현 지역상공회장 김승일이 헌납한 승일애국부채공장 등입니다.1



1980년대부터는 합영공장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의 대북투자가 이뤄졌는데요. 이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에 세워진 합영회사의 대부분이 조총련계였습니다. 사회주의 조국의 미래를 위해 벅찬 꿈을 안고 투자한 거죠. 그런데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다 망했습니다.



남한에 투자했던 사업가들이 정말 현명했던 거죠. 신격호 회장은 그 중의 최고였습니다. 이제 신격호 회장이 별세하셨으니 1세대 재일 사업가들은 거의 다 떠난 셈이죠. 남은 분으로는 89세의 한창우 회장이 있는데요. 김연아 선수 경기에 후원광고로 알려지게 된 기업, 마루한의 회장입니다. 마루한은 일본 최대의 파친코 기업이죠. 한창우 회장은 세계한인상공인연합회 회장도 겸하는 분입니다. 그분도 89세가 되었네요. 한국 경제의 기적을 만들어냈던 분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신격호 회장 별세에 즈음하여 재일교포 사업가들의 고국 투자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김정호 /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 서강대 겸임교수




* 이 글은 2020.1.22 <김정호의 경제TV>로 방영된 <신격호회장 추모 특집. 박정희를 선택한 신격호. 김일성을 선택한 조총련. 재일 한인 사업가들의 엇갈린 운명>의 텍스트입니다.



1 배종렬, 북한 외자정책과 대북투자 활성화 방안, 통일문제연구, 제06권 1호,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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