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과 오만: <왜 결정은 국가가 하는데 가난은 나의 몫인가>

김기영 / 2021-02-05 / 조회: 1,617

요즘 한국사회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다. 이미 입법화된 임대차 3법을 비롯해서, 중대재해법 등의 기업 관련법, 탈원전 정책, 최저임금제 등, 모든 정책들이 충분한 검토와 예비적 시행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들이 모두 초헌법적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모두 하나 같이 개인의 재산권 침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와 돈이 윤리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지 되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돈이 인간의 자유를 박탈한다고 역설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인용한 성경 구절을 떠올려보자.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정도를 벗어난 욕망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공통 되게 강조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소유가 인간 사회의 윤리와 자유를 저해하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산업혁명 따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적절한 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보면, 페리클레스와 같은 고결한 영웅도 올바른 경제관념과 부의 중요성을 가장 우선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정책을 입안하는 정책 결정자들도 역시 하나 같이 ‘정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위선인지 아닌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상황이 악화일로임 분명한데도, 태도의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정말로 이러한 정책들이 올바른 것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신념이 현실과 잘못된 방식으로 괴리가 되어갈 때, 인간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념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진 이들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 같다. 자신들의 판단착오와 그로 인한 파국에 대해 해명을 요구할 때마다, 그들은 늘 남 탓을 하거나, 비판에 아예 귀를 닫아버리니까 말이다. 그들이 정말 이 책의 주 저자인 로렌스 W. 리드의 지적대로 “의도가 좋기 때문에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다.”라고 믿고 있다면, 이는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오만이다. 그리고 무지한 확신은 잠재적 부덕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치적 권력이나 이념적 헤게모니를 얻는 순간,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는 최악의 부정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편저서를 읽으면서, 리드를 포함한 여러 저자들은 바로 이 점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언급한다. 멀게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 시절 인간성이 말살된 비참함에 대한 리얼한 경험 기록과, 가깝게는 차베스 정권 이후 철저하게 몰락한 베네수엘라의 경우를 말이다. 이 일들은 한 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들’이다. 관료적 전체주의가 내린 어리석고 오만한 결정의 대가는 오롯이 국민의 가난과 죽음으로 현상화 된다는 사실 말이다.


리드는 이러한 오만이 그것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이에크의 지적을 통해 역설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맹목적인 확신에 차 있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에크의 지적대로 ‘최종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집산주의적 원칙은 모든 도덕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우려가 현상화된 것이 개인의 재산권을 경시여기는 일련의 정책들이 아닐까 한다.


나는 늘 궁금했었다. 왜 사회주의는 자신들의 선택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잠정적인 태도는 올바른 윤리 실천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도 분명 자신들은 올바른 정의를 믿으며, 그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윤리를 추구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그들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잠정적인 태도, 즉 불완전함에 대한 겸손이다. 바쿠닌과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교리문답>이라는 광기어린 글을 보면,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내가 느낀 가장 직관적인 경험은 괴로움이었다.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네차예프를 주된 모티프로 『악령』이라는 소설을 썼는지는 이런 괴로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납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두려움 없는 인간의 오만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태도는 결코 자유의지의 발로일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명확한 해석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는 독재자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수록 글(article)에서 리차드 M. 이벨링이 언급한 한 문장의 말 덕분이었다. 이벨링은 명확히 말한다. 마르크스가 꿈꾸던 유토피아의 핵심 구상은 “사람의 본성이 어떻게든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라고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바로 이 점이 사회주의와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 사이의 임계적 차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해 인위적 망상을 꿈꾸지 않는다. 이벨링은 말한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이타적이고 사심 없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이다. 나도 이 말에 동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정직이야말로 이기적인 인간이 반드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 조건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들의 강한 이기심이 제어 받지 못할 때, 사회는 날 것 그대로의 약육강식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배고픔에서 해방되는 최소한의 자유가 주어져야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심리적 여유가 생긴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실존적 조건의 해결은 필연적으로 절충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절충을 회색분자의 태도라고 비난하고, 우리의 본성을 거스를 것을 요구한다. 자연의 역행이다. 


개인적 자유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우리의 본성이 가진 한계와 가능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신중하며, 현실적이고, 냉철하다. 그들은 결코 절대적으로 완전한 수단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대신 우리의 본성이 가진 단점을 효과적으로, 적절히 제어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가진 가능성의 정도를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가 곧, 정치·사회적으로는 법치주의이며, 가격에 의한 시장 경제이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이 가진 이기적인 본성을 개조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반()자연적인 수정주의일 뿐이며, 사회공학적인 망상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내 것을 지키는 것보다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밖에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처럼 말이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모든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정체(政體)가 될 수밖에는 없다. 미제스의 <관료제>를 보면, 레닌은 당시 자리 잡아 가던 전국적인 우편 시스템으로부터 소비에트 체제의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과 관료적 전체주의의 독재가 소외시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욱 참담한 결과를 낳는지는 우리는 이미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지막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정직과 오만’, 이 두 가지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질적으로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윤리적 기준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직한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한계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동안의 역사적 발전을 통해 얻은 긍정적인 확신은 그로 하여금 이 한계를 가능성으로 발현시킬 노력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그 결과, 가장 공정한 정의란, 자신의 손이나 의지가 아닌, 법과 시장이라는 시스템의 확립과 적절한 권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겸손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에는 이런 겸손이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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