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주 이병철…일본을 배운 뒤 일본을 추월하다

자유경제원 / 2016-11-17 / 조회: 9,694       미디어펜
고도성장기 일본과 호암(湖巖) 이병철

일반적으로 기업사와 기업가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을 가지고 접근한다. 개별 기업 내 경영자원의 전개와 제도 및 조직의 변천과정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거나, 기업 경영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부정책 등 외부요인과의 관계를 중점 분석대상으로 하는 흐름이 그것이다. 미국의 경우 전자의 연구가 훨씬 더 많지만, 한국과 일본의 경우에서는 후자의 연구가 전자 못지않다. 이것은 일본과 한국의 기업 성장사가 미국과 달라서이다.

특히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한국 기업의 형성과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일본이 한국 기업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것과 일본의 영향이 상당히 컸음에도 일본과의 연관성을 중점적으로 다룬 기업사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삼성그룹의 성장 과정과 창업자인 이병철의 경영활동, 삼성 이외에도 일본 영향을 받은 한국 기업과 기업인들은 아주 많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기업을 설립한 기업가들은 거의 모두 일본과의 관계를 도외시하고서는 기업 형성 발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전후복구를 넘어 세계2대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던,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시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기업의 성장과정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본을 통해서 정보와 지식을 얻는 등 배움의 터전으로 활용했다. 호암(湖巖) 이병철에게 일본은 배움과 모방의 대상이자, 극복하고 싶은 대상이기도 했다. 본론에서는 이병철이 지녔던 “일본관”이 용일(用日)을 넘어 극복하고픈 대상으로써의 “일본”에 초점을 맞춰 보겠다.

이병철의 일본관 : 동경과 극복의 대상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이병철 개인의 일본관이 어떠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고, 자서전에 몇 차례 언급을 했을 뿐이다. 이병철 개인에게 일본이라는 나라는 외국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기업 성장 과정에서 일본의 자본, 기술, 경영 지원을 받은 국내 기업들은 상당히 많음에도, 삼성과 이병철에 대해 한정해 분석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삼성과 이병철은 한국의 대표적 재벌이자 기업가이다. 하지만 이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병철은 1950년대 말 이미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미 삼성은 5개 시중은행 중 3개를 소유했으며, 이를 포함해 무역 · 제당 · 모직 · 증권 등 13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던 기업임은 물론이며, 이후에도 삼성은 현대와 더불어 국내 재계순위 1~2위를 줄곧 유지해온 기업이다. 한국 대기업의 자본축적과정을 논할 때 삼성과 이병철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는 의미다.

둘째, 한국 기업들 가운데 일본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 이병철의 삼성이었다. 국내 재벌그룹 가운데 가장 일본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났던 기업이며, 셋째, 이병철은 한일합방(경술국치)이 되던 1910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는 이후 1931년 만주사변, 1937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1945년 종전과 해방 등 식민지 시대의 격변기를 모두 체험한 인물이다. 또한 식민지시기 일본에서 대학까지 다녔으며, 창업을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였다.

이병철이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36년 이었으나, 다음해에 터진 중일전쟁으로 파산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1938년 무역과 양조업을 재기했는데, 이 역시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경영환경이 극도로 불안해지자 이듬해 경영에서 손을 떼고 1945년 까지 칩거생활을 했다. 일본과의 사업 관계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후 무역업1), 1953년 제당업(제일제당), 1954년 모직업(제일모직)으로 제조업에 진출했다. 이때 그는 일본에서 기계 설비를 들여오거나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플랜트 구입선을 일본으로 한 것은 일본 제품의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과 거리가 가까워 부품조달 및 플랜트의 애프터서비스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예컨대 이병철은 제당 플랜트를 일본 업체에서 들여오면서 이를 조립 및 설치, 시운전을 해줄 일본인 기술자도 필요했다고 술회했다. 또한 모직 사업에서 플랜트역시 일본에서 도입하려 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실패했다.

  
▲ 삼성은 기업의 성장과정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본을 통해서 정보와 지식을 얻는 등 배움의 터전으로 활용했다. 호암(湖巖) 이병철에게 일본은 배움과 모방의 대상이자, 극복하고 싶은 대상이기도 했다. 사진은 (좌)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우)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좌)삼성그룹, (우)미디어펜


일본이 이병철에 미친 영향과 대일교류

문제는 이승만과 당시 정부의 배일(排日) 감정이었다. 당시에는 일본제 플랜트의 수입은 물론, 일본인 기술자의 입국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이병철이 플랜트를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기술자는 도저히 입국할 수 없어 제당 플랜트는 국내 기술자만으로 악전고투하면서 설치해야 했다. 이처럼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직업에 진출할 때도 관련 플랜트를 일본에서 또 도입하려고 했다.

그만큼 일본 제품의 비용상 이점이 컸음과 동시에 정부의 제동역시도 상당히 많았는데, 모직공장 설립허가를 신청한 이병철에게 독일제 플랜트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허가를 해주었다. 이병철과 일본의 대일 교류가 본격화된 것은 1960년 이후 시작됐다. 이때는 플랜트뿐 아니라 신규 사업 진출과 관련한 컨설팅 지원도 일본에서 받을 수 있었다. 무역업 위주로 사업을 하던 이병철은 제조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했지만 어떤 업종으로 할지를 명확히 정하지 못했다.

고심 끝에 이병철은 제약과 제지, 제당업 중 하나를 고르려 했다. 결국 그는 세 업종에 대해 미쓰이 물산에 컨설팅을 해달라고 의뢰했지만, 미쓰이는 사업성 분석과 기획에만 제당은 3개월, 제약 6개월, 제지 8개월이 걸린다는 답변을 받고 사업성 분석이 빨리 마무리되는 제당업 진출을 결정했다. 모직업도 마찬가지였다. 이병철은 모직공장의 건설과 기술 협력을 일본에서 받기로 하고 모직업에 관련된 마스터 플랜을 일본모직에서 세워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

정보수집 창구로서의 활용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후 이병철은 활발하게 일본과 교류했다. 즉 일본을 자본과 기술, 경영방식의 도입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이러한 교류는 다른 국내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병철은 1960년부터 매년 정초가 되면 도쿄를 방문했다. 일본기업가들과 교류하고 언론을 접함으로써 인적 네트워크도 쌓고 세계의 정치 경제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특히 자주 접했던 인물들이 반도체 산업의 어머니로 불리는 샤프의 부사장, 신일본제철 회장, 이토추 상사 회장 등을 자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2)

일본에서의 기술도입은 전자산업뿐만 아니었다. 축적된 기술이 요구되는 제조업에 진출할 경우 삼성은 거의 대부분 일본과 합작을 맺었는데, 197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그러했다. 조선업과 기계공업(삼성중공업, 1974년 설립)은 일본 IHI와, 섬유화학은 미쓰이 석유화학과, 합성섬유는 일본 도레이 및 미쓰이 물산과 제휴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이병철은 대일의존도를 조금씩 탈피하기 시작하며, 1980년대가 되면 일본과의 합작을 통한 신규사업 진출과 회사 신설은 크게 감소했다.

이렇게 일본 의존도가 낮아진 이유는 일본도 70년대가 들어서부터 기술이전을 매우 꺼려했기 때문이고, 삼성의 상당한 기술 축적도 한몫 했으나, 무엇보다도 1970년대 후반 이후 합작 및 기술도입 사례를 보면 대부분 정밀기술이 요구되는 특정부품산업과 정밀공업, 컴퓨터등 산업용 전기산업이었다. 일본보다 기술이 우월한 미국과 유럽 기업이 강점이 있는 업종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매달릴 이유가 상대적으로 적어지기  시작했던 이유가 크다.

추월 하고 싶은 대상으로의 일본

이병철 회장은 이처럼 일본에서 배우고 모방하면서도 장차 일본을 이기겠다는 극일(克日)의식을 가졌다. 그렇게 평가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이병철의 발언이다. 일본에 배울 것이 많더라도 필요한 것만 배운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산기술, 품질관리는 일본이 낫다. 그러나 기술의 원천은 원래 미국이 아직도 월등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자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술도입의 4원칙’을 설정하고 이를 임원들에게 주지시켰다. 그 중 하나가 “도입의 거점을 도쿄에 두고 세계 특허 등 고급 자료를 입수해서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는 일본에 두되, 눈은 세계를 향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품질관리는 일본과, 기술제휴는 미국 및 유럽기업과 맺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병철은 또 “수동적인 도입에 만족하지 말고 도입 이후의 기술학습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입한 기술을 발판으로 신기술을 계속 개발하도록 독려한 이유다. 특히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면서 “도대체 일본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뭐냐”, “일본은 되는데 우리는 왜 안되나”라며 임직원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둘째, 기술과 자본이 없어 일본에서 당한 수모도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초반 한국비료를 건설하기 위해 일본 미쓰이 물산에서 차관을 도입하려 했지만 수수료 문제가 걸림돌이 된 데다 일본의 고압적인 자세로 인해 결렬을 경험하기도 했다. 당시 이병철은 미쓰이 물산에 “돈을 빌리는 처지일망정 나는 고객이다” 라고 일갈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또 삼성전자-산요전기를 통해 가전제품을 생산 할 때도 산요전기측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생산을 시작하자 산요전기는 기술정보와 자료제공을 제한했고, 삼성전자에 공급하는 부품과 원재료도 고가의 가격인상을 단행한 이유로 결국 1975년 합작을 파기했다.3)

셋째, 이병철은 어느 정도 기술이 축적되면서 독자 브랜드에 의한 수출전략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주로 일본 도시바 등에 수출하는, OEM방식이었다. 이는 안정적 수요가 확보될 뿐 아니라 마케팅이나 유통, R&D 비용등이 절감되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부가가치가 낮은 데다 계획적인 생산이 어려울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일본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이병철은 1982년 처음으로 'SAMSUNG'이란 브랜드를 단 컬러TV를 유럽에 수출하는 등 독자 브랜드에 의한 생산을 시작했지만 이병철은 극일의 바탕을 제공했을 뿐 극일을 이룬 것은 후세대인 이건희 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 이병철은 1982년 처음으로 'SAMSUNG'이란 브랜드를 단 컬러TV를 유럽에 수출하는 등 독자 브랜드에 의한 생산을 시작했지만 이병철은 극일의 바탕을 제공했다. 삼성그룹이 극일을 이룬 것은 후세대인 이건희 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맺으며

이병철의 일본 인식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하지만 단편적인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면서도 일본인, 특히 일본 기업가의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이병철은 다른 식민지시기를 살아온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양면적인 일본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또한 이병철은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기업가라는 점에서, 설령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더라도 일본에 대한 관계를 줄이지는 않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이병철의 일본인식이 삼성의 자본축적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여러 한국 기업가들 중에서도 이병철은 특히 일본 지향적이었으며, 따라서 삼성 역시 일본 색채가 매우 강했다. 이병철 본인이 식민지시기를 살아온 사람이자, 일본유학파 출신이기에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세 아들과 손자까지 일본 유학을 시킨 것을 보면 일본 지향성이 매우 강했던 기업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병철은 일본을 가장 진취적으로 활용한 기업가이기도 했다. 단순한 기술 및 자본도입선이 아니라 국내외 경제 및 경영정보를 수집하는 창구로 썼으며 이를 삼성의 경영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사실 모방과 학습역시 기술도입의 한 부분이므로 쉬운 일이 아닌 매우 치밀한 전략이 요구되는 싸움이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점에서 이병철은 일본에서 배우고 모방하기를 전략적으로 한 기업가라고 평가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다음세대 경영자인 이건희가 극일에 성공한 요인이었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1) 삼성물산, 이병철 「호암자전」

2) 김영욱 :이병철의 일본모방과 추월에 관한 시론 2010

3) 삼성경제연구소, 「호암의 경영철학」, 130p


(이 글은 16일 자유경제원이 리버티홀에서 주최한 삼성그룹 창립자 故 이병철 회장 서거 29주기 ‘이병철의 기업가정신이 시대에 주는 교훈’ 세미나에서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가 발표한 토론문입니다.)

[임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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