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연예인은 공인이므로 사생활에도 제약이 따라야 한다?

이문원 / 2020-01-16 / 조회: 13,096

요즘은 좀 덜한 논쟁인데, 사실 이렇다 할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서 덜해진 건 아니다. 늘 비슷비슷한 갑론을박들이 계속 반복되고 결론도 안 서다보니 그냥 서로서로 지쳐 '대충 넘어간’ 형국이다. 이러다 또 무슨 피치 못할 계기가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불붙을 것이 빤하다.


일단 이 '연예인=공인’ 논리의 시작점부터 살펴보자. 이재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언론과 공인’에서 이렇게 흐름을 설명한다.


“1980년대까지는 공인의 개념 속에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등 대중스타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략) 1990년대 들어 언론에 등장한 공인이라는 용어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그 개념의 급격한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업무의 성격상 공공성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공직자나 정치인 등에게 공인이라는 호칭을 붙였으나, 1990년 이후 그러한 관행이 현저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실제적으로 '공인’이란 개념 자체가 특정인물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기준이자 행동의 제약으로 설정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본래 공인 개념의 한계였던 공무원 등은 이미 그 호칭 자체에 '공()’이 들어가 있었기에 따로 칭할 필요가 없었던 대신, '그 외’를 직군들을 공무원에 준하는 행동제약 범주로 넣기 위해 탄생된 개념인 셈이다. 이에 대해선 “정치공방 차원에서 교수나 변호사 등 민간 여러 직종에 걸쳐 정치와 연관된 인사들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서 등장한 개념”(이정훈 전 통신기자협회 사무처장)이란 해석 등이 존재한다. 이후 상황을 이재진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인의 잣대가 1990년대 이후 '일의 성격’에서 '이름의 저명성’으로 폭을 넓혔지만, '공인’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TV 탤런트는 한 인터뷰에서 오랜 연기자 생활에도 불구하고 스캔들 하나 없었던 비결을 묻자 “공인의 입장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참고 살아왔다”(세계일보 1999.12.10)라고 말하였다. 유명 가수들의 상당수가 번호판을 떼고 다니는 문제와 관련해 한 중견 가수의 말을 인용해 “고충은 있겠지만 공인다운 태도를 보여야 팬들의 사랑이 이어진다”고 쓴 신문기사(서울신문, 1999.10.20) 또한 공인으로서 연예인의 자세와 전통적인 공인 즉, 공직자 등에 대해 사회가 요구하는 자세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략) 이처럼 언론은 개인의 '인지도’와 '사회적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를 기준으로 공적 인물의 의미를 구성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연예인=공인’론이 자리 잡기 시작한 건 대략 1999년 즈음이란 것. 다음으로, 특이하게도 연예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공인이라 칭하며, 역시 '스스로’ 행동제약을 받아들이고 있단 점이다. 당시 교수나 변호사 등 여타 직종 인물들이 공인으로서 책임을 묻는 언론의 태도에 자신은 공직을 맡고 있지 않음으로 명백한 사인(私人)이라 반박하던 모습과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서병기 헤럴드경제 대중문화 전문기자는 “아직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가 낮던 시절이어서 비록 엄격한 행동제약을 받아들이더라도 자신을 공직자 등과 같은 신분으로 받아들여주는 언론의 태도에 동의하게 된 것”이라 해석한다. 즉 스스로 채운 재갈이란 얘기다.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자 연예인들 스스로 '공인’임을 부정하기 시작


2000년대 들어 '연예인=공인’론은 사실상 일반화 단계를 걸었다. 무엇보다 연예인들 스스로부터가 이를 긍정하며 되레 반기고 나섰으니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연예인들이 이에 거부감을 표하기 시작한 게 2010년 전후 즈음부터다.


그 시발점이 된 사례가 2009년 등장한다. 가수 비가 MBC에브리원 '신해철의 스페셜 에디션’에 출연해 연예인 역할에 대한 얘길 나누다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연예인을 단순히 연예인으로만 봐줬으면 한다”고 언급한 건이다. 이에 같은 프로그램에서 MC를 맡던 신해철도 “국가로부터 막중한 책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을 공인이라고 한다. 연예인의 경우에는 공인이 아닌 사인이라 해야 맞다”고 응수했다.

이후 '연예인=공인’론은 주로 연예인 측으로부터 무수한 공격과 부정을 받아왔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게 된 맥락은, 위 서병기 기자 해석과 맞물려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2000년대 들어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가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한류(韓流)가 폭발하면서 대중문화계 거의 전 직종에 걸쳐 연예인들이 세계적 인기를 얻고 막대한 수입을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더더욱 그랬다.


연예인들은 이제 '국가의 자랑’이 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등 국가기관에서도 이들을 초청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 각종 공공기관 상패들은 예사로 수여됐다. 대학에서도 연예인 특강을 잡으려 애쓰고, 각종 지자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10대 청소년들 대표적 미래희망 중 하나로 연예인이 빠지는 일이 없게 됐다. 돈도 많이 벌뿐더러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무엇보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연예인들도 저 '공인’이란 신분이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2010년 즈음 돼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비판받는 현실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것. '지위상승’ 메리트가 깨지고 나면 남는 것은 제약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즈음부터 '연예인=공인’론은 거의 매년 대중문화계에서 사실상 고정논란처럼 갑론을박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지금은 어떨까. 서두에서 언급했듯, 지금도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이슈 자체가 너무 반복되다보니 그 횟수만 줄어든 상황일 뿐이다. 예컨대 경향신문 2019년 4월8일자 칼럼 '연예인이나 유명인은 공인일까’에서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그렇다면 누가 공인인가. 전통적으로는 사전적 의미를 중시하여 고위 공직자를 공인이라고 불렀다. 저명한 사람도 공인에 포함시켜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면서도 “뉴스 가치가 있는 저명성이나 매체의 노출빈도에 근거하여 유명한 인물을 공인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도 설명한다. '현 상황은 이렇지만, 문제는 있다’ 정도 언급이다.


국립국어원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상 명확한 해석을 포기한다.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로 보면 사회적 영향력이 큰 종교인, 연예인, 운동선수 등은 '공인’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략) '연세현대한국어사전’은 '공인’의 두 번째 뜻풀이로 '사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큰 유명한 사람’을 제시”한다며 양쪽 해석 사례를 모두 게재한 뒤 설명을 끝낸다.


해외 'Public Figure’ 개념은 한국의 '공인’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석은 해외 사례를 언급하고 넘어가야만 풀린다. 애초 '공인’은 영미권에서 쓰이는 'Public Figure’를 직역한 용어다. 그런데 'Public Figure’는 한국의 '공인’과는 다르게 쓰이는 용어다.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Public Figure’는 주로 언론과의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즉, 이들은 그 사생활 일부가 언론에 의해 노출됐을 때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사람들이란 측면을 말한다. 단순히 '유명인’에 불과하더라도, 이들 삶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정보제공 요구가 언론 역할 일부에 부합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들 사생활 일부가 언론에 의해 폭로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해석인 셈이다.


당연히 이들에게 '사회적 책임’까지 요구하는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미국 등지는 연예인 등 대중스타에 대해 '셀레브리티 celebrity’ 개념만을 적용한다. 그저 잘 알려진 인물일 뿐이며, 엄밀히 민간시장에서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사는 이들의 행적은 그들에 대한 '시장의 판단’으로서 심판받는단 입장이다. 즉, 사생활이 문란하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발언으로 언론의 도마에 오르면 이들을 소비하는 대중시장에서 그 '심판’이 내려질 뿐, 그 외에 그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순 없다는 것. 사실상 '원론’이다.


물론 해외 연예인들 중에도 연예인의 사생활 측면 '사회적 책임’을 거론하는 이들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처녀’란 점을 어필해온 할리우드 배우 브룩 쉴즈,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이 있다. 물론 이들의 '처녀 주장’은 결국 본인 스스로의 고백으로 거짓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단 점을 알기에 그런 부분을 거짓말하게 됐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단순히 유명인에 불과하더라도 그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에 일정부분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단 입장. 이에 대해 각 언론들은 그저 자기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선택한 거짓이란 식으로만 해석하지만, 어찌됐건 '그런 입장’이 존재할 수도 있단 점은 인정하고 넘어간다.


중요한 건, 어찌됐건 '사회’와 '언론’이 그런 책임을 강제하진 않는단 점이다. 그런 부분은 각자 판단에 맡기고 그 의사를 존중하는 식이다. 본인 스스로가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느껴 소위 '공인’으로서 행동제약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 자체로서 존중하지만, 동시에 특별히 그런 책임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입장 역시 존중한다. 엄밀히 스스로의 '철학’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각기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단 점을 용인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연예인의 사회적 책임을 언급하는 연예인들도 딱히 '다른 연예인’들도 같은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철학’일 뿐이란 애기.


문제는, 한국은 이런 상황이 잘 연출되지 않는 분위기란 점이다. 위 할리우드 예는 다분히 개인주의적 입장이다.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사회적 책임의 적용면적을 넓히는 일을 추구하지 않는단 입장. 그러나 한국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여전히 집단주의-전체주의적 분위기가 강하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식 해석이 등장하기 쉽지 않다. 명확히 정해진 '하나의 룰’이 존재해야 하며, 모두가 그 룰을 따라야만 한단 입장이 더 강하다.


그래서 '연예인=공인’ 논란도 2~3년에 한 번씩 계속 불거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건 '개인의 철학’에 불과하니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를 수 있단 점은 굳이 언급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회엔 하나의 명명백백한 룰이 적용돼야 하며, 그에 어긋나선 안 된다는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스스로’들 조성하고 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해 사회문화적으로 개인주의 분위기가 역력한 여타 선진국들 상황이 한국선 그대로 재현되기 힘들단 얘기다.


'질투’를 사회적 룰의 기반으로 삼는 사회는 반드시 패망한다


끝으로, '연예인=공인’론을 바라보는 한국대중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대중은 의외로 이 같은 논리를 매우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간혹 논란이 일더라도 해당연예인 팬덤에서나 반박할 뿐, 그와 관련 없는 일반대중은 대부분 '연예인=공인’론에 찬동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연예인은 한국서 '너무 많이 가진 인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온전한 '기득권층’이다. 언급했듯, 특히 한류 폭발 이후 웬만한 기업 오너에 버금갈 정도로 막대한 부를 얻는다. 또 정치권에서도 홍보에 목말라 수많은 행사에 초대되고 자리를 주고 싶어 난리일 정도로 사회적 지위도 가졌다. 거기다 스포츠스타 같은 경우 특정조건 하에서 병역도 면제되고, 이제 그런 논의는 '국가를 자랑스럽게 한’ 여러 연예인들에도 적용돼야 한단 식으로 옮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같은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원하는 외모권력(?)까지 지닌 이들이다. 어떤 의미에선 기존 정치경제적 기득권층 '이상’의 기득권층에 가깝다.


이런 '기득권층 이상의 기득권층’, 이른바 '신흥 기득권층’에 대한 대중의 견제심리가 발동돼 찬동을 얻어낸 게 바로 '연예인=공인’ 논리란 얘기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졌으니 이제 이들에게 '짐’도 그만큼 지워줘야 한다는 식 형벌(punishment) 논리. '그래야 한다’는 특별한 명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질투’에 기인한 공격심리가 이런저런 논리들을 엮어 실체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위험한 발상이다. '질투’를 사회적 룰이자 동력의 한 축으로 삼는 사회는 언제나 패망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성공적인 사회는 언제나 더 많은 '자유’를 확보코자 움직여지는 사회다. 질투에 기인한 보복심리, 강제된 평등 심리론 결국 '모두가’ 억압받고 제한받으며 옴짝달싹할 수 없는 사회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남을 억압해 질투와 시기로 인한 고통을 달래보려다 결국 같은 화살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반대로, 타인의 자유를 지켜줄 수 있어야 자신의 자유도 보호받는 법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어찌됐건 이 '질투’를 기반으로 여러 사람들을 '공인’이란 개념 하에 억누르고 짐을 지우려 안달이 난 분위기다. 이젠 대기업 회장 일가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공인’이라 불린다. 그래야할 이렇다 할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심지어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도 않아 '셀레브리티 celebrity’ 개념, 'Public Figure’ 개념에도 들어맞지 않지만, 그래도 무조건 '공인’이다. 어찌됐건 '유명한 기업’의 오너 집안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니 사회적 책임도 그만큼 부여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논리가 생성된다. 이쯤 되면 이미 논리의 게임 자체가 아니다. 대놓고 '보복’에 불과하다.


어찌됐건 연예인들도 이런 대중생리를 이젠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더 이상 가수 비나 신해철처럼 “연예인은 공인이라 볼 수 없다”는 식 주장은 대외적으로 내뱉질 않고 있다. 그래봤자 이전에 없었던 대중의 반발심리만 부추긴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스타로 떠오르면 각종 자선단체에 대한 '기부’가 이른바 '자기관리’ 차원 불문율처럼 작동하고 있다. 스스로만 그렇게 행동하면 또 모르는데, 대중도 늘 그에 압박을 가한다.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난 뒤엔 “그렇게 돈 잘 벌면서 기부도 안 하냐”는 힐난이 각종 포털사이트 댓들로 작렬한다. 이미 정상이 아닌 분위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연예인들은 오히려 '기득권층’이 아니라 일정부분 '약자’라고까지 볼만하다. 그저 질투심에 기인해 만들어진 갖가지 명분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수한 공격을 받고, 향후 커리어 및 수입에 큰 지장을 받게 되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기부도 하라면 해야 되고, 연애나 결혼까지 참견을 받는다. 이런 상황을 놓고 진정으로 '일리가 있다’고 찬동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연예인=공인’론은 대중 스스로 폐기 처분하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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