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감성과 환원론적 사고의 극복

배민 / 2020-05-19 / 조회: 226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공지나 지시사항을 누구도 오해하지 않게 정확히 전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후자는 주로 자신의 관점에서 혹은 자신의 기준으로 내용을 전달한다. 이들은 자신이 말하는 내용에 대한 '맥락(context)’을 듣는 사람도 당연히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로 일하다 보면 2020년이라는 연도를 빼고 월일(月日) 만으로 일시가 적힌 문서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많은 경우에 별문제가 없을 지 모르지만, 정확히 일의 경위를 알아보고자 할 때에는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의미 소통의 어려움은 개인뿐 아니라 한 사회에서도 발생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쓰는 언어가 정확한 의사소통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면, 그것은 그 언어가 '객관적 엄밀성’보다는 '맥락 중심적’인 체계를 갖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나는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역사교사치고는 꽤 다양한 학문 영역을 공부할 수 있었다. 처음엔 치의학 공부를 했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영역을 바꿔서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사료(史料)를 독해하기 위해 한문을 익혔다. 이후 석사과정을 하면서 이전의 두 학문 영역을 융합한 '인문의학’을 공부했다. 석사논문 속에서 나는 어느 문학 작품 (1950년대 한국 단편소설)을 의학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의 관점에서 분석했고, 박사논문은 또 다른 (의철학 및 의사학에 관한) 주제로 온전히 영국에서 영어로 작성했다. 


이러한 나의 경험은 이들 다양한 언어와 학문 영역 각각에 존재하고 작동하는, 미묘한 관점과 접근방식의 차이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가령 한자와 영어, 한국어 간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대충 의사소통을 위한 수준에서 외국어를 배운 경우는 그 본질적인 차이를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들 언어 간에는 의미 소통의 핵심 요소가 매우 다르다. 특히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말해보자면, 전자는 의미 전달의 핵심이 명사(名詞)에 있다. 독어처럼 명사에 성()까지 부여하진 않더라도, 명사를 단수, 복수로 구분하는 것은 기본이며, 관사(a/the)를 활용해 보다 정확한 의미를 구분한다. 반면, 한국어는 서술어, 특히 변화무쌍한 어미의 활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령 영어로는 'He kicked a ball’ 로 쓰여진, 심플한 하나의 문장이 한국어에선 '그가 볼을 찼다/찼어요/찼네요/찼단다/찼구나/차버렸다/차고 말았다/찼단 말이지’ 등 다양한 어미의 조합으로 부사를 추가하지 않고도 서술어를 무궁무진하게 표현할 수 있다. 반면 영어와 달리 'kicked’ 인지 'has kicked’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즉 말하는 지금의 기준으로 어느 시점에서 정확하게 볼을 차는 행위가 발생했는지를 전달하는 엄밀성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ball’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와 내가 알고 있는 'the ball’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저 'a ball’인지를 대개는 알 수가 없다. 즉, 명사 '공(ball)’보다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느냐, 어떤 맥락에서 말하느냐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어떤 현상이나 대상을 정확히 표시하는 면에서 영어에 비해 한국어는 어려움이 있다. 과학을 공부할 때와 문학을 공부할 때 이 두 언어의 차이는 보다 극명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다양한 맥락을 구분 지어 어미에 반영하는 언어 구조는 본질보다는 외양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 어려움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극복해 왔을까? 바로 한자이다. 한자를 사용함으로써 대상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추구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점은 사범대에서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특히 한자로 된 조선시대 학자들의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점이기도 하다. 지금도 기억나는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 서문은 내가 읽은 그 어떤 영어로 된 텍스트보다 명료하면서도 심오했다. 


얼마 전 친구와 얘기하다가 내가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한) 한국사회는 개인이 미분화된 사회”라는 말을 했다. 친구는 처음에 그 '미분화(未分化)’의 미분을 '微分’으로 오해했다. 나는 한국사회가 집단 중심의 사회에서 개인 중심의 사회로 아직 분화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말했는데, 친구는 한국사회가 '개인주의화되어 나갔다’는 정반대의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어쩌면 한국인들 사이의 의사 소통은 매우 피상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우리 자신은 그걸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90년대 이래로 한글전용은 사회적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강화된 한국어의 '맥락 지향적인 언어 구조’는 예술이나 인문학적 감성에는 잘 부합하지만, 논리적으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기엔 비효율적인 것이 사실이다. 


가령 당신이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면 음악을 듣거나 소설을 읽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고양된 '감성’으로 어떤 대상을 논리적으로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1세기 한국 사회에선 버젓이 역사의 트라우마와 경제적 불평등, 즉 증오와 원망의 '감정’을 앞세운 정치 경제적 선동이 기승을 떨치고 있다. 결국 (한국어나 일본어처럼) 맥락 지향적인 언어 구조 하에서는 한자로 된 명사를 적극 활용하지 않으면 엄밀하고 객관적 사고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한편 '대상 지향적인 언어’, 즉 현상이나 대상 자체를 지나치게 세밀하고 엄밀하게 분석하여 표현하는 언어 구조도 그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가령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추상명사들을 구분하여 논리에 활용함으로써 그들의 사상은 현실에서 괴리되어 나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현대 좌파들, 소위 'cultural marxist(문화마르크스주의자)’들의 행동과 유사하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라는 절대명제 자체로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좌파 인권 운동가와 지식인들은 여성과 노동자, 동성애자, 장애인, 학생 등의 인권을 따로 구분한다. 


마치 성리학자들이 인간의 심성을 쪼개고 또 쪼개어 나아갔던 것처럼, 이들 좌파 'identity politics(정체성 정치)’의 본질은 환원론적(reductionist)이고 분절적인 인간 이해이다. 즉,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본질에 전체적(holistic)으로 접근하기보다, 사회적 인간의 자아(self)를 불필요하게 많이 구분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물론 대학교(university)라는 플랫폼 안에서 기능하는 현대 모든 학문들은 대부분 그러한 환원론적 시각과 접근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연과학의 경우는 이것이 매우 효과적인 접근법인 것이 사실이다. 가령 분자를 원자로, 원자를 다시 원자핵과 전자로 계속 더 미세하게 분리해 나간다. 하지만 의학의 경우만 해도 몸의 생리적 현상을 이런 환원론적 방식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아직 인간의 지식과 이해가 많이 부족한 수준이다. 가령 치아와 잇몸뼈, 치과재료에 대한 아무리 수많은 생리학적, 의공학적 지식과 데이터를 총동원하여 치과 임플란트를 만든다 해도, 건강한 자연치아를 결코 대체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인간의 복잡한 사고와 행위 자체를 탐구 대상으로 하는 경제학과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사회과학의 영역에선 어떨까? 이러한 (가령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인위적으로 분류하고 규정하는) 접근 방식에 의거하여 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분명히 한계를 가진다. 더 나아가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여 정부나 사회가 개인의 의사 결정 행위에 개입을 하거나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는 거의 항상 부작용을 초래한다. 즉 실패한다. 


가령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여 각각 사회적 약자와 강자로 파악하는 시도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약자인 여자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특히 이혼하는 경우에, 남편의 모든 재산을 여자에게 다 주도록 이혼법을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여자들은 결혼생활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관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리고 사회전체적인 시야에서 보면, 그러한 이혼법 하에서 결코 여자들은 행복해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에 가게 되면 결혼 시장에서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자들이 가난한 여자들을 강도를 대하듯 피하게 될 것이다. 


극단적인 비유이긴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처럼) 인간을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분하든 (페미니스트처럼) 사회를 남성 중심문화와 여성 중심문화로 구분하든, 이러한 분절적이고 환원론적인 접근은 대상 지향적 언어구조와 관계가 깊으며, 여러 비효과적이고 파괴적인 정책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왔다.


인간이 자신의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들이 '대깨문’이라고 자처했던 사람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객관적인 좌표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부터, 즉 '맥락’으로부터 한발짝 물러나서 자신을 '외로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사고가, 단순히 분절적인 지식이나 이론의 축적 위에 성급하게 어떤 현상이나 대상을 이해하거나 판단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결국 당신이 말하는 언어와 당신이 갖고 있는 사고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좌파 사회주의 세계관에 선동 당하거나 세뇌될 확률은 매우 낮아진다. 


숭의여고 역사교사 배민


: 위 글은 <미디어워치>에 기고한 기사 '선동과 독선을 피해 슬기롭게 사는 법’의 원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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