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위하여

한정석 / 2020-12-02 / 조회: 4,099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동맹은 전제정(專制政)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선 싸움에서 승리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기념비적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가 전제주의를 이긴 것’으로 평가하는데 인색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은 스파르타를 맹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격파됐다. 스파르타는 오늘날 공산주의에 비견되는 전형적인 전체주의 군사 국가였다. 고대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테네 폴리스는 스파르타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온갖 선심성 복지와 포퓰리즘의 나락에 빠져 쇠퇴를 거듭했다.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 승리했던 것인가?  


1919년에 성립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직전 해인 1918년 민주시민혁명으로 황제 카이저가 폐위되고 의회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출범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자유주의에 입각해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었고 동시에 입법권이 헌정을 위반할 경우,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대통령의 비상대권도 인정했던 모범적인 헌법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입법권으로 행정권을 접수하는 위헌적인 수권법을 통해 나치 독재를 수립해 가는 과정에서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자신에게 부여된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행사해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자유주의는 파시즘에 굴복했다.


1989년 여름 폴란드에서 바르샤바의 공산당 정권이 붕괴되고 2년 후인 1991년, 크리스마스 날에 옛 소련연방이 해체됐다.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 후쿠야마는 이를 '역사의 종언’으로 선언했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함으로써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정신이 구현되었고 그 결과 이념적 투쟁의 역사는 끝나고 세계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후쿠야마의 선언은 페르시아를 이긴 아테네 병사의 마라톤 승전보처럼 자유주의 진영에는 낭보로 들렸다. 


그러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1년 9·11테러는 미국의 적이 소련의 공산주의에서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로 바뀌었다는 신호탄이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져 들었고 미군 전사자는 9·11 테러로 숨진 사망자 수 2천9백73명을 넘어섰다. 그러면서 천문학적인 재정 지출이 일어났다. 제로 실질 금리와 막대한 유동성의 공급, 늘어난 규제들은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중국이라는 또 다른 야심만만한 권위주의 체제의 강자가 미국의 적으로 부상했다. 역사는 종말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국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손


역사적 승리가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보였던 자유주의는 그러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정치적 패배로 이어지는 수난사로 점철되어 왔다. 좌파적 자유주의자든, 우파적 자유주의자든 역사의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는 것을 두고 칼 슈미트는 이들이 정치적인 것의 본질, 즉 '적과 동지의 질서’를 망각하는 '종말론 사무소의 일상’이라고 비꼬았다. 역사의 종말은 정치가 존재하는 한 올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이유로 자유주의자들에게 정치는 불신의 대상이 되기 쉽다. 특히 '작은 정부’와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우파적 자유주의자들1에게는 더욱 그렇다.


근대 경제학은 사회 안에 자연적인 법칙이 있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가치나 신념의 문제는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이듯이, 경제법칙 안에서도 가치나 도덕은 배제되어 다뤄진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정치를 '해결 된’ 것으로 전제한다. 그렇기에 정부의 개입이 없는 민간의 공급과 수요가 만나는 시장이 사회나 국가보다 우선적이라는 믿음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자유주의자들, 정확하게는 시장 우위적 자유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나 공화주의는 자유에 대해 거추장스럽거나 본질에서 벗어난 문제가 된다. 하이에크가 말했듯이, 자유가 법의 내용에 관한 것이라면 민주는 그 법의 제정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주라는 질서에 어떻게 정당성의 기초를 확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얻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시장이 자생적 질서에 의해 성립되듯이, 국가도 그러한 자생적 질서로 인해 등장하는 것이고 여기에 민주제든 군주제든 공화제든, 그것은 그 사회의 인민(people)2들 저마다가 처한 문화적 경로에 의해 진화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 이는 독일의 헌법 철학자 칼 슈미트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관찰한 여러 통치 형태의 폴리스들로부터 한 국가의 정치제도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외적의 방어에 가장 적합한’ 시스템으로 선택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스 폴리스들에게는 민주정이든, 귀족정이든, 군주정이든 그 목적은 모두 같았던 것이다.


칼 슈미트의 이러한 고찰은 아담 스미스가 시장에서 가격의 자기 조절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한 것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떠 올리게 한다. 자생적 질서로 등장한 시장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신()의 오른 손’이라면, 그리고 언어처럼 국가라는 정치 질서도 자생적으로 등장한 것이라면 정치는 보이지 않는 '신()의 왼 손’은 아닐까. 물론 이 신()은 우리의 제한적 이성으로는 모두 파악할 수 없는,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우리의 진화된 정도보다 더 복잡한 세계에 내재한 원리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의 정치론: 의지인가 의견인가?  


자연과 인공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개미탑과 인간의 국가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유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최소 국가’가 좋다는 생각이 지지받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최소 국가’ 혹은 '작은 정부’라는 것은 지극히 부조리한 관념에 불과하다. 국가란 어쩔 수 없어서 작은 정부를 하게 될 수는 있으나, 발전하고 있는 국가는 결코 작은 정부를 지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생적 질서의 시장이 정부라는 방해자 없이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교환적 범위를 스스로 넓혀 가듯, 자생적 국가도 자기 주권의 관철 영역을 넓히려 든다. 우리는 이러한 국가들을 역사에서 '제국’이라 불렀던 것이며 모든 국가는 스스로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가의 제국적 본성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기에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강대국 간의 경쟁과 갈등을 목도한다. 다만 조셉 나이(Joseph S. Nye Jr.)의 고찰대로 그 양상이 과거 무력을 동원한 하드파워의 질서였다면, 오늘날에는 경제라는 미들파워와 문화라는 소프트파워가 결합하면서 경쟁의 질서는 전선과 국경이 없는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의 질서로 변환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 결과 현대 국가들은 총성 없는 세계 대전을 치루는 가운데, 국내 정치는 이러한 세계대전으로부터 동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익숙한 얼굴의 적들에 대해 여전히 '의지’가 아닌 '의견’으로 맞서고 있다.


정치적 국가 안에서 개인은 제 각각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키고자 연대한다. 그러한 연대를 통해 발현되는 의지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general will)3로 총화 된다. 그러한 인민의 일반의지가 헌법과 법률의 재개정에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한다. 루소가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강제’라는 의미는 종종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형용 모순으로 비판되었으나 이는 모두가 복종해야 하는 국가의 법에 관한 것이었다. 입법과 행정의 통치행위란 언제나 인민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루소의 일반의지는 전체주의나 사회주의의 배경으로 오해되고 있고 그렇기에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통치와 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인민의 일반의지는 단순한 개인들의 다수결적 자유의지의 합이 아니라는 이 모순 가득한 루소의 일반의지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이 이 답을 찾는 과정은 2천 년 전,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율리시즈가 고향 아티카로 돌아가는 험난한 여정이 담긴 오디세이와 같다. 이제 그 모험의 돛을 올려보자.




1 정치학자 김비환은 자유주의 스펙트럼에 대해 시장과 국가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시장우위적 자유주의, 균형적 자유주의, 민주우위적 자유주의로 구분한다.

2 국민(nation)의 개념은 실재성을 가진 인민(people)과는 달리, 근대국가에서 주권의 담지자를 의미하는 단일한 의제된 인격, 즉 실재하지 않는 픽션적 개념이다. 

3 루소가 주장하는 인민의 일반의지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함께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인민의 일반의지는 개인들의 이질적인 자유의지들의 산술적 합으로서 전체의지가 아니라, 동질성을 가진 부분들의 차이 합, 즉 구적분(mensuration by parts)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후에 자세하게 논의하기로 한다.



참고문헌

김비환 / 현대 자유주의의 스펙트럼과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 / 철학연구 / 2005.11.

강희원 / 픽션(fiction)으로서 국민주권― 헌법상의 「국민주권」원리에 대한 단상 /  법철학연구 / 2020.08.

박지영‧김선경 / 하이브리드 전쟁의 위협과 대응 / 아산정책연구원 / 2019

장 자크 루소 / 사회계약론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6.10.

칼 슈미트 / 정치신학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 그린비 / 2010.10.

하이에크 / 법, 입법 그리고 자유 / 자유기업원 /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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