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사 3부작 ② 미친 듯 돈 번 시대, 1977~2012 등소평에서 시진핑 전까지

김정호 / 2020-03-31 / 조회: 451


김정호_2020-05.pdf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68jRe0Xk1Cc&t=8s


이 글은 중국 근현대사 3부작 중 제2부입니다. 1978년 모택동 사망부터 2012년 시진핑 집권 전까지의 역사입니다. 이미 대부분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정리하는 의미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1978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했습니다. 1949년부터 30년을 다스려왔던 절대권력자가 사라졌으니 권력공백이 생겼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죠. 공식적인 후계자는 모택동이 생전에 지명한 화국봉(華國鋒)이었고 모택동의 통치방식을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화국봉은 등소평(鄧小平)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1981년 실각을 하게 되고 등소평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안휘성 샤오강촌(安徽省 小崗)이라는 곳에서 18인의 농부들이 비밀리에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폭력 반란은 아니고요. 일해서 정부에 납부할 것만 내고 각자 알아서 가지자는 밀약을 맺은 것이죠. 모택동 시절 중국의 농민들은 모두 인민공사에 강제 소속되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생산하고 같이 잤습니다. 사유재산 같은 것은 없었죠. 그야말로 공산주의 사회였습니다. 그 결과는 극심한 빈곤이었습니다.


아사지경에 몰린 샤오강촌의 농민들이 죽을 각오로 비밀리에 자본주의 방식을 채택한 겁니다. 밀약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 방식으로 1년 생산한 것이 그 이전의 5년 생산량을 합친 것만큼 됐던 겁니다. 모택동 시절이라면 당장 처형당했겠지만, 등소평은 1980년 그 방식을 오히려 전국으로 확산시킵니다. 이같은 농가책임생산제를 포간도호(包幹到戶) 라고 부릅니다. 포간도호 덕분에 농업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1985년에는 농작물을 수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향진기업이라는 형태로 소규모의 민간기업도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는 폭발적이었습니다. 1978년 이전 하나도 없었던 민간기업이 10년 후인 1988년 1,453만개나 생겨납니다. 고용된 직원도 2,300만 명에 이르게 되죠.



사실 공산당에게 민간기업은 고민스러운 존재입니다. 직원을 고용한 사업주는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공산주의자의 관점에서는 자본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셈이 되는 거죠. 따라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등소평은 민간 기업 체제를 밀어붙입니다. 등소평이 없었다면 중국의 발전은 불가능했습니다.


한편 개혁파들은 사기업체제의 도입뿐 아니라 개방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세계의 자본과 시장을 활용하고 싶었죠. 그러기 위해 미국, 일본 같은 서방국가에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1978년 등소평은 미국과 수교를 마무리하고 1979년에는 직접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웃는 모습이 TV를 통해 모든 미국인들에게 방영됐습니다. 미국인들이 그 모습에 매료 당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중국을 믿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등소평은 외국인투자자들이 마음 놓고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경제특구를 조성했습니다. 또, 상해의 푸동지구에 초현대식 고층빌딩 타운을 조성했습니다. 중국이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룸을 만든 것입니다. 등소평의 이런 노력은 대성공을 거둬서 외국인직접투자가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원래 돈에 악착같은 사람들입니다. 중국식당에 여기저기 붙여 있는 복자, 이것은 부자의 부와 발음이 같습니다. 자동차 번호판 중 가장 비싼 것은 8888인데요. 이것은 부자가 된다는 Fachai(發財)의 첫 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은 새해 인사도 공희발재(恭喜發財), 즉 ‘돈 많이 버세요’입니다. 모택동 시절부터 억눌려왔던 그 Fachai 욕구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풀려난 겁니다.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죠. 그들은 세계를 상대로 해서 억척같이 돈을 벌어 나갔습니다.


학교가 다시 공부하는 곳으로 바뀐 것도 큰 변화입니다. 문화대혁명 시절에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교사가 아니라 어린 학생들이 접수했습니다. 누굴 죽일지 모욕을 줄지나 궁리하는 곳이 된 거죠. 그런 학교들도 새 시대를 맞아 정상화되어 갔고 학생들은 치열하게 공부하는 시대가 돌아왔습니다.


농촌의 농가책임경영제와 사기업 활동이 허용되면서 중국인들의 소득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엄청났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빈부격차가 생겨났습니다. 당간부들이 뇌물을 받아 부자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인민들의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게 된 대학생들은 그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4월 급기야 호요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장례를 계기로 천안문 광장에 모인 20만 명. 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등소평은 정치적 자유까지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개혁-개방을 하기는 했지만 중국은 엄연한 사회주의 국가였습니다. 즉 경제분야에서만 사유재산과 경제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지 정치적 민주주의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탱크가 동원되었고 시위대는 무참히 학살되었습니다. 우리가 천안문 사태라 부르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되자 당내에서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등소평은 다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개혁-개방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등소평은 경제특구인 센젠(深圳)을 방문해서 도시의 모습을 중국전역에 보여줬죠.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센젠은 놀랄 정도로 발전해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다시 설득되었죠. 특구에 한정되던 외국인들의 투자를 거의 전역으로 확대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그래프에서 보듯이 외국인직접투자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소득도 급격히 늘게 되죠.



1989년 베를린 장벽의 해체, 1991년 12월 26일 소련연방의 해체도 등소평에게 힘을 실어 준 요인입니다. 소련 공산당이 붕괴된 후 러시아가 겪은 무정부상태를 중국의 지도부는 원하지 않았던 거죠.


등소평은 1997년 2월 19일 사망했습니다. 1978년부터 1996년까지 중국경제는 연평균 10%의 성장을 이어왔습니다. 위대한 업적입니다.



등소평을 이어받은 것은 강택민(江澤民)이었습니다. 강택민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 방식으로 성장을 하다 보니 무수한 부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원래 공산당에게 부자는 적입니다. 부자, 즉 자본가를 타도한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것이 공산당의 기본 강령이었다. 그런데 개혁-개방 정책을 하다 보니 자본가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강령과 현실이 충돌한 거죠.


강택민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3개 대표론을 들고나옵니다. 공산당은 노동자-농민만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기업가와 지식인도 대표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3개 대표론입니다. 이 이론은 2002년 당강령에 포함되고 헌법에도 들어갑니다.


그 사이 중국은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을 한 겁니다. 사실 WTO는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시장경제 국가들의 기구여서 중국은 자격이 없었죠. 개방되었다고는 하나 시장경제 국가들에 비하면 여전히 닫힌 나라였습니다. 국내경제에 대한 통제도 심했죠. 당연히 반대하는 회원국들이 많았습니다. 그 나라들을 설득하고 중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입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개인이 꿈을 실현하면 (정부에)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 발전과 맞물려 중국은 미국처럼 변모할 것이다.”


지나고 보니까 클린턴이 지나치게 순진했던 거죠. 하지만 당장은 클린턴의 예상이 맞는 듯해 보였습니다.


WTO 가입은 중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철저히 닫혀 있던 중국의 많은 시장들이 개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서방 국가들의 개방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그 이전에 비해서는 엄청난 변화임이 분명했습니다.


WTO 회원국이 되면서 중국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공장이 되어 갔습니다. 중국경제의 성장률은 다시 10%대로 올라섭니다. 경이적인 성장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가입 당시 1.3조 달러이던 GDP는 2017년 12.2조 달러가 되어 세계 2위로 올라섭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중국도 2008년 세계경제위기라는 암초를 만나게 됩니다. 수출수요가 급격히 줄었죠. 중국은 내수의 확대로 돌파구를 마련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4조 위안(당시 약 800조 원)의 재정을 풀어 내수경제 살리기에 올인했습니다. 기업들 특히 국영기업들에게 돈을 대출해줘서 전국 각지에 인프라를 건설하게 한 거죠. 부동산 붐이 일고 자동차·가전 산업 등 중국 내수 시장이 빠르게 살아났습니다. 그 덕분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대중수출이 늘어서 세계적 불황이 어느 정도 보충되었습니다. 중국이 세계 경제를 구원한 셈입니다.


하지만 경이로운 성장의 그늘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첫째, 환경오염입니다. 대기오염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빈부격차입니다. 지니계수가 0.73으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극단의 빈부격차가 생겨났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셋째, 부채입니다. 내수 경기를 자극하느라고 돈을 많이 풀어냈고 그것을 가져다 쓴 기업들이 빚더미에 올라 앉았습니다.

넷째, 부패입니다. 당간부와 관료들이 공공연히 뇌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인민들의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 때 등장한 지도자가 2012년 선출된 시진핑(习近平)입니다. 시진핑 이후부터는 제3부에서 다루겠습니다.


김정호 /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 서강대 겸임교수




* 이 글은 2020.2.22 <김정호의 경제TV>로 방영된 <중국근현대사 2부. 미친듯이 돈 번 시대. 등소평에서 시진핑 전까지. 1977~2012>의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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