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민사회, 연고집단, 사회자본

도서명 한국의 시민사회, 연고집단, 사회자본
저 자 유석춘
페이지수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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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NGO 시리즈 5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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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무도 권하지 않은 길을 외롭게 간 결과다.


‘시민사회’와 ‘연고집단’ 그리고 ‘사회자본’이라는 세 가지 주제가 한국의 현실에 뒤엉켜 존재하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셋 가운데 ‘시민사회와 사회자본’의 관계는 긍정적이지만 나머지 ‘시민사회와 연고집단’ 그리고 ‘연고집단과 사회자본’의 관계는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공부가 계속될수록 이러한 전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선 시민사회에 관한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하나의 사실은 이 개념이 서구의 역사적 배경에 깊은 뿌리를 가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시민사회는 서구가 봉건사회에서 절대왕정으로 변화하고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시민혁명을 겪으면서 근대적인 정치체계 즉 대의제 민주주의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 ‘시민’ 즉 ‘부르주아’의 등장을 조명하는 개념이다. 물론 이 때 이들 시민이 원했던 것은 국가로부터의 독립 즉 자율성이었다. 


경제적으로 이들은 국가의 개입 없이 자유로운 시장에서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정치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대표가 의회를 구성해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자신들이 시장에서 번 돈으로 세금을 내는 이상, 또한 그렇게 하여 국가가 유지되는 이상 이들은 국가가 자신의 운명을 타율적으로 결정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가를 감시해야 했다. ‘국가를 견제하는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시민사회는 바로 이와 같은 출생의 배경을 가지고 탄생한 개념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바로 이와 같은 서구의 시민사회를 우리의 현실에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오랜 권위주의 통치가 민주화의 물결에 밀려나자 우리가 서구와 같은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넘쳐났다. 재야 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양 김씨의 연이은 집권은 우리 국가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승리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모두들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와 같은 시민사회의 등장은 이미 이루어졌거나 혹은 앞으로 조만 간에 이루어질 당연한 역사의 ‘진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87년의 민주화를 기준으로는 15년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92년을 기준으로는 이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시민사회는 아직 서구와 같은 자율성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 시장의 자율성과 시민사회의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실은 여전히 국가가 시장을 관리하고 또한 시민사회는 여전히 국가에 의해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시장에 대한 국가에 개입은 최근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대한 개입을 계속하고 있는 국가마저도 내세우는 명분은 시장의 자율적 발전을 위해 개입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는 결국 개입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가 시행한 공적자금의 조성과 집행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선택된 기업은 엄청난 혜택을 받았고 배제된 기업은 가차없이 도태되었다. 개발연대 초기에 국가가 경제성장을 위해 특혜를 활용하던 방법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다른 한편 시민사회가 여전히 국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최근의 소위 ‘언론개혁’을 둘러싼 사태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우리 사회의 신문이 아무리 공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소유구조상 신문은 대부분 민간 소유다. 즉 우리 신문은 기본적으로 시장의 영역에 속하는 ‘기업’이다. 그런데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시민단체가 나서고 또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세무조사를 하여 천문학적인 세금을 추징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치적 목적으로 세무사찰을 활용하던 권위주의 국가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정부의 ‘홍위병’으로 시민단체가 나섰다는 사실일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답이 가능하다. 하나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답이다. 즉 아직 우리의 시민사회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여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차츰 우리도 서구와 동일한 즉 ‘국가를 견제하는’ 시민사회가 정착될 것이라고 믿는 견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한국 사회에는 서구와 같은 시민사회의 정착이 결코 쉽지 않은 그리고 혹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대답도 가능하다면 이 책은 조금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많은 학자들이 전자의 대답을 선택한 길을 가고 있다. 물론 모두들 확신에 차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발전에 관해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결과는 그러한 확신을 허락하지 않는다. 역사의 보편성을 받아들이기에 한국사회는 서구와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의심은 결국 한국에 나타난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유교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개념으로 접근하는 논문들을 발표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의심은 시장이나 국가의 영역과는 구분되는 한국 시민사회의 구성과 발전에 관해서도 적절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우리의 시민사회에 관한 문헌들은 모두 현실의 특정한 측면만을 자의적으로 부각시키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문헌들은 시민단체 즉 ‘자원적 결사’의 역할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동시에 연고집단의 역할은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들여다 본 한국의 시민사회는 아무리 보아도 수수께끼와 같은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서구사회에서 그 사회적 기능이 최소화된 혈연‧지연‧학연과 같은 전통적 인간관계에 기초한 연고집단이 바위같이 버티며 온갖 좋은 일 나쁜 일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시간이 갈수록 이들 전통적인 연대의 기능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한국에 민주화를 가져온 것은 결국 지역주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하자 나의 의심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일차집단에서 이차집단으로’ 혹은 ‘게마인샤프트에서 게젤샤프트로’와 같은 서구 근대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연고집단과 같은 전통적인 연대의 방식이 현대사회에 제공하는 역할은 무엇인지를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사회자본’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며 이러한 혼란은 조금씩 정리될 수 있었고 이제는 하나의 확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회자본 개념은 우리의 전통적인 관계 맺기 방식인 혈연‧지연‧학연이라는 방법이 바로 서구의 자원적 결사에 못지 않은 사회적 자원이 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나에게 우리사회가 경제적으로 산업사회 그리고 정치적으로 민주사회로 바뀌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시민사회 혹은 비정부‧비영리 영역에서 전통적인 연고집단이 강력한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성찰 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책이다. 


이러한 과정의 작업을 항상 가까이서 지켜보며 관심과 격려를 베풀어 준 동료들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외로웠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도 특히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함재봉 교수, 홍콩 城市대학(City University of Hong Kong)의 Daniel Bell 교수, 그리고 코펜하겐 NIAS(Nordic Institute of Asian Studies)의 Geir Helgeson 박사에게 감사한다. 이들은 모두 이 책에 실린 글들이 하나 하나 국내외에서 발표될 수 있도록 그래서 객관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들의 관심과 배려가 없었으면 나는 지금과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때로는 나의 생각을 비판하고 때로는 나의 생각에 동의하며 함께 공부한 학부와 대학원의 학생들 때문에 결코 나는 외롭지 않았다. 이들은 한편으로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다. 특히 나와 함께 이 책에 포함된 글들을 준비하는 작업에 동참한 장미혜 박사, 박사과정의 배영, 그리고 석사를 마친 김태은과 김용민에게 감사한다. 교정을 도맡아 수고해 준 왕혜숙과 임태형에게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시류에 역행하는 내용임에도 기꺼이 출판을 결정한 자유기업원의 민병균 원장과 박종찬 실장, 그리고 편집을 담당한 황지선 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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