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주의와 행태주의

Ludwig von Mises / 2019-09-16 / 조회: 1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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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Ludwig von Mises,

Positivism and Behaviorism

15 October, 2018


인간행동의 과학을 자연과학으로부터 구별 짓는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을 해석하고 이론을 구성하는 과정에 있어 각 영역이 어떠한 체계에 의존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최종인(final cause)에 대해 무엇도 알 수 없다. 자연과학은 온전히 인과관계의 논리에 따라 연구와 이론화가 이루어진다. 한편 인간행동의 과학은 '목적'과 그에 대한 '의식적 추구'라는 궤도 위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인간행동의 과학은 목적론적(teleological)이다.


원시인이든 오늘날의 사람들이든, 인간의 일상적인 사고와 행동은 이 두 가지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아주 간단한 요령이나 기술도 결국 인과관계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통해 수집된 지식의 산물이다. 인과관계를 어떻게 파악해 내는지를 모를 때에 사람들은 목적론적 해석 방식으로 눈을 돌린다. 그들은 신(deities)이나 악마를 발명하여 어떤 특정한 현상을 이들의 목적-의식적(teleological)인 행동이라고 이해했다. 한 신은 천둥번개를 내리쳤고 다른 신은 죄 지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다. 또 마녀의 저주받은 눈길은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들었고 젖소에게 더 이상 우유가 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행동했다. 희생양을 재물로 바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혀 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으로 여겨졌고, 악한 마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주술적 의식이 행해졌다. 사람들은 기상 현상이나 질병, 전염병의 확산은 자연현상이라는 사실, 또한 마법 의식이 아니라 피뢰침과 항생제가 효과적인 보호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천천히 알아갔다. 자연과학은 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 최종원인론(finalism)적 인과 연구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험적인 자연 과학이 일구어낸 놀라운 업적들은 '실증주의(positivism)'이라는 유물론적인 형이상학 교리를 탄생시켰다. 실증주의는 그 어떠한 연구의 영역도 목적론적으로 이루어져선 안 된다고 단언한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실험 방식만이 모든 연구 영역에 대한 단 하나의 올바른 연구 방법이라고 여긴다. 그것만이 '과학적'이고, 인간행동의 과학에서 운용되는 모든 전통적인 연구 방법은 그저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이다. 실증주의 옹호론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미신적이요 거짓된 것이다. 실증주의는 감각적 경험을 묘사하고 해석하는 것에 과학의 역할을 국한시키고, 모든 역사적 교리들과 심리학적 자기 성찰을 배척한다. 특히나 경제학을 비난하는 일에는 광적으로 열심이다.


실증주의의 창시자는 절대로 아니지만, '실증주의'라는 말을 지어냈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인간행동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 방법을 '사회학(soci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이 사회학이라 하는 것은 결국 '사회물리학'을 의미하고 이는 뉴턴 역학의 인식론적 체계에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너무도 얄팍하고 터무니 없는 것이어서 그것이 한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시도된 적조차 없다. 콩트를 추종하는 첫 번째 세대는 대신 다른 연구 방법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들은 그 연구 방법을 통해 사회 현상을 생물학적이고 유기적으로 해석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은유적인 언어 속에 빠져 있었고, 사회라는 '신체(body)' 속 어떠한 것이 '세포간물질(intercellular substance)'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꽤나 진지한 토론을 펼쳤다. 이러한 생물학주의나 유기체설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사회학자들은 야심차게 콩트를 추종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후험적(a posteriori) 법칙을 발견해내려는 시도는 사라졌다. 다양한 역사학적, 민족지학적, 심리학적 연구들이 '사회학지'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이들 연구 중 대부분은 다분히 호사가적이며 혼란한 것이었고, 일부 연구만이 역사 연구의 몇몇 분야에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다.


한때 역사 철학을 풍미했던 방식대로 역사적 과정의 난해한 의미나 목적에 대해 자의적인 형이상학적 삼출물들을 토해내는 것을 사회학으로 여겼던 자들의 저작물들은 가치를 잃어갔다. 이렇게 하여 에밀 뒤르켐과 그의 학파는 '군중 심리(group mind)'라는 이름 하에 낭만주의라는 옛 유령을 부활시켰고, 독일의 역사학파는 민족정신(Volksgeist)을 부활시켰다. 


실증주의 운동의 이런 명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신실증주의(neopositivist) 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콩트가 범했던 오류들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콩트에게 영감이 되었던 동기와 같다. 시장 경제와 그것의 정치적 수반 사항인 대의제나 사상•표현•언론의 자유에 대한 특유의 혐오감이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동료들이 최고 권력기관의 권자에 앉아 반대자들을 침묵시킬 권한을 갖는 것을 당연시하며 전체주의, 독재, 그리고 반대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갈망할 것이다.


콩트는 몰염치하게도 그가 싫어한 모든 학설들에 대한 억압을 지지했다. 인간행동 과학에 대한 신실증주의 운동을 이끈 가장 압제적인 인물은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이었는데, 그는 1919년 단명한 뮌헨의 소련 체제를 이끌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후에는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관료와 협력하기도 했다. 이 열정적인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스스로의 계획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비판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이내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인식론적인 층위에서 부정하고 나섰다.


경제학에 대한 신실증주의적 비난은 크게 두 가지 변종—범물리학주의(panphysicalism)와 행태주의(behaviorism)—으로 나타난다. 이 둘은 모두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 그들이 '비과학적'이라 규정하는 목적론적 연구법을 순수한 인과론적 연구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범물리학주의는 물리학의 연구법이 모든 학문에 적용되어야 하는 단 한가지의 연구방법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자연과학과 인간행동의 과학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본질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의 이면에는 "통일과학(unified science)"이라는 범물리학주의의 슬로건이 있다. 물리적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감각적인 경험은 다른 이의 행태에 관한 모든 정보도 역시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떠한 인간이 다양한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은 어떠한 사물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물리학의 언어는 모든 지식의 분야에 예외 없이 사용되어야 하는 보편 언어이다. 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이야기는 모두 형이상학적 헛소리다. 인간의 역할이 우주의 여타 물질의 역할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의 소치이다. 과학자의 눈으로 보아 인간을 포함한 세상만물은 동등하기 때문이다. 의식성이나 의지, 합목적성을 논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은 그저 우주의 작은 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사회물리학이나 사회공학과 같은 응용과학은 과학 기술이 구리와 수소를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을 다스릴(engineer) 수 있다.


범물리학주의자들도 인간과 물리학에서 다루는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적어도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돌이나 원자는 스스로의 본성이나 특성, 행태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인간들에 대해서도 사유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나 인간을 다스리지도(engineer) 않는다. 반면 인간은 최소한 물리학자이자 공학자라는 점에서 다른 것들과는 차별된다. 인간이 여러 가능한 행동 방침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사실, 또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서 공학자로서의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는 왜 연락선을 주조하지 않고 다리를 건설했을까? 그는 왜 한 다리는 10톤을 견디도록 짓고 다른 다리는 20톤까지 견딜 수 있도록 지었을까? 그는 왜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지으려 하는걸까? 대부분의 다리가 무너져 내리지 않는 건 정녕 그저 우연의 장난인걸까?


인간행동을 다루는 데 인간이 특정 목적을 의식적으로 추구한다는 관념을 도려내고자 한다면 그 빈 공간은 예컨대 어떤 초인간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인류를 모종의 숙명적인 결말로 이끈다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 메워져야 할 것이다. 이 때, 다리 건설자가 다리를 건설하도록 만든 것은 정신(Geist)의 숙명적 계획이거나, 유한한 인간이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물질적인 생산 동력일 것이다.


인간이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환경적 조건에 맞춰 적응해나간다는 진술은 충분하지 않다. 영불해협이라는 환경에 어떤 사람은 그냥 집에서 머물고, 어떤 사람은 보트나 범선, 증기선으로 해협을 건너려고 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은 직접 헤엄쳐 건너려고도 한다. 몇몇은 비행기로 해협을 건너고, 어떤 사람들은 해저 터널을 구상한다. 이 같이 반응의 양상이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술적 지식이나 노동력·자본재의 공급과 같은 주변 상황의 차이 때문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공허한 시각이다. 이들 조건들도 결국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고, 목적론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행태주의적 접근은 범물리학주의와 몇몇 부분을 달리하지만 의식성과 합목적성에 대한 고려 없이 인간행동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범물리학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행태주의는 '적응(adjustment)'이라는 슬로건을 기반으로 추론을 전개한다. 다른 생물들처럼 인간은 외부 환경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킨다. 그러나 행태주의는 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외부 자극에 각기 달리 적응하는지를 설명해내지 못한다. 왜 누군가가 폭력적 억압으로부터 도망할 때 다른 누군가는 그에 저항하는 것인가? 서유럽인들이 인간의 복지를 좌우하는 세상 만물의 희소함에 대처하는 방식은 왜 동양인들의 대응 방식과 다른가?


행태주의는 동물심리학과 유아심리학에서 발전된 연구 방법을 통해 인간행동을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반사 작용이나 본능, 자동 현상(automatism), 무의식적 반응을 연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행태주의는 대성당과 도로, 요새를 건설하게 한 '반사 작용'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도 말해주지 않고, 철학과 시(), 법률 체계를 구상하도록 만든 '본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왕국의 흥망성쇠를 결정했던 '자동 현상'에 대해서도, 원자를 쪼개뜨리는 '무의식적 반응'에 대해서도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행태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그저 외부에서 관찰되는대로 이해하려고 하며 단순히 특정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만 다루려고 한다. 그것들의 의미나 목적에 대해서는 일절 참작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한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부여한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상황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 의미 부여를 간과한다면 연구자는 그의 반응 방식을 결정지은 본질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반응은 절대로 자동적이지 않고 개인의 해석과 가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 개인은 그가 행동을 통해 그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마주했을 환경보다 그가 선호하는 어떤 다른 상황을 목표로 한다. 누군가가 어떠한 물건을 팔겠다고 선언한 후 펼쳐지는 상황을 잠재적인 거래 당사자들이 그 물건에 부여하는 의미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 묘사하려고 하는 행태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행태주의는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를 추방해내고 이를 생리학(physiology)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행태주의자들은 생리학과 행태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해내는 일에 한번도 성공적이었던 적이 없다. 왓슨(John B. Watson)의 설명에 따르면 생리학은 "동물의 여러 부분이 작동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다. … 행태주의도 역시 이들 부분의 작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한편 본질적으로 동물이 하나의 전체로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하지만 감염이나 생장, 노화에 신체가 반응하는 것을 두고 신체 각 부분의 '행태'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누군가를 치기 위해서든 어루만져주기 위해서든) 누군가의 팔이 움직이는 것을 인간이라는 동물 하나의 행태로 부르고 싶다면, 그 움직임은 분명 생물체의 어떠한 독립적인 부분에만 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자의 의미 부여나 동기가 아니라면, 혹은 의미 부여나 동기가 발할 수 있는 무명의 무언가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에 귀속될 수 있겠는가? 행태주의는 인간의 행태를 예측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컨대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쥐새끼야!'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의 반응을, 그 사람이 그 욕에 부여하는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서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실증주의의 두 변종은 모두 인간이 어떠한 목적을 의도적으로 달성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모든 사건은 자극과 반응의 관계로 기술될 수 있기 때문에 행태주의자들은 최종인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다. 이런 고집스러운 독단주의에 맞설 때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인간행동 외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최종원인론을 기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이다. 자연과학이 최종인을 다루지 않는 것은 그들이 최종인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최종인을 발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 그리고 그것들의 연속과 배열의 규칙성이 가지는 상호연관성에 대한 이해나,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가 인간 지식의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이 우주에 최종인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단호하게 기각시키지는 못한다.


자연과학이 최종인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인과 연구에만 몰두하는 이유는 그 연구 방법이 연구 대상에 대해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과학 이론에 따라 설계된 복잡한 장비가 이론이 예측한 바에 따라 잘 작동하는 것은 그 옳음을 실용적으로 입증한다. 다른 한편 주술적 장비들은 기대와 일치하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그 주술적 세계를 납득시킬 수 없다.


물론 내가 아닌 타인이 합목적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추론을 통해 만족스럽게 증명해내는 일도 역시 분명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의 영역에서 인과 연구 방법의 배타적인 사용의 정당화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실용적 근거가 인간행동의 영역에서 목적론적 연구 방법의 배타적인 사용을 정당화 할 수 있다. 인간을 돌멩이나 쥐와 같이 다루는 연구법은 작동하지 않지만, 목적론적 연구 방법은 작동한다. 지식과 이론의 탐구 과정에서도 잘 작동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도 그에 못지 않게 잘 작동한다.


실증주의자는 자신의 관점을 아주 은밀하게 취한다. 목적과 그에 맞는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동료 시민들의 능력 부정해놓고는, 자신은 학술적 탐구 과정에서 다양한 연구법 중 하나를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적 공학이든 '사회적' 공학이든 공학 문제 앞에만 서면 입장이 바뀌는 것이다. 그는 여러 정책이나 계획을 구상하는데, 이러한 행위가 어떠한 외부 자극에 대한 '자동 반응'으로 해석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는 결국 동료들의 행동할 권리를 빼앗아 자신의 특권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는 사실상의 독재자다.


행태주의자 왓슨이 말하길 인간은 "달릴 준비가 되어있는 하나의 잘 조립된 유기적 기계"이다. 그는 기계가 그를 설계하고 조작하는 인간이 정한대로 달리는 반면 인간은 자유롭게 이리저리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무엇을 물려받았든 모든 인간은 하나의 포드 자동차처럼 동등하다." 이 같은 명징한 오류로부터 시작해서, 그는 마치 운전자가 포드 자동차를 몰듯이 이 '인간 포드(human Ford)'들을 조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인류를 소유하기라도 한 양, 자신이 구상한 대로 인류를 빚고 통제하려고 한다. 그로써 그는 하늘의 명을 받기라도 한 듯이 법 위에서 인류에 군림하게 된다.


실증주의가 그들의 철학과 이론,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계획과 정책을 자극과 반응의 관계로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실증주의는 부전자패(不戰自敗)하게 되는 것이다.


번역: 조범수

출처: https://mises.org/library/positivism-and-behavio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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