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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지력(知力)과 반(反)지성을 우려하며

309 이승수 | 2016-12-30 | 조회수: 2,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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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을 앞두고 마음이 가볍지 않다. 광장의 열기가 그 끝을 모른 채 폭주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년도 경기전망이 어둡기 때문만도 아니다. 광우병 파동처럼 광장의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한 겨울 밤의 열병으로 기억될 것이다. 경제도 비록 한 해는 나쁠지 몰라도 절망할 만큼 비관적이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한 해의 끝에서 나는 우울해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일, 내년이 아니라 앞으로 10년, 20년 후 대한민국의 주인공이 될 대학생들의 지력(知力)과 '반(反)지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지금의 대학생에게 반지성이라 칭하는 것이 의아하거나 불쾌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스펙과 지력은 다르다. 영어성적이나 인턴 경험과 같은 외국어 구사력과 사회생활 경험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체화된 지식과 누적된 지식으로서의 지력은 부재한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생의 현실이다. 거기에 더해 제도화된 교육을 통해 배우는 체계적 지식을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반지성의 풍토마저 유행하고 있다.
 
대학의 교정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대자보와 현수막이다. 최루탄의 연기가 난무하던 1980년대에나 어울릴법한 대자보와 현수막이 2016년의 대학가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기술 발달에 힘입어 그 내용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더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른바 명문대학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대자보와 현수막을 가득 메운 주장과 선전의 수준은 유감스럽게도 20세기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논리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의 전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된 일방적 정보('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를 받아 적거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쓰는 이념적 용어를 조잡하게 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긴 무슨 사건 하나 터질 때마다 누가 먼저 쓰느냐를 다투듯이 만들어내는 대자보이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실을 확인해보고, 주장의 타당성을 분석해보고, 나름의 사유를 통해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아가려는 노력 자체가 없기에 오늘도 교내엔 그저 낙서만이 너저분히 널려있을 뿐이다.
 
대자보와 현수막 제작에 가장 열심인 소위 운동권도 지력에 있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무식하다. 대놓고 무식이란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니 양해를 바란다. 요즘 운동권을 자처하는 혹은 스스로 '행동하는 지성’이라 자부하는 학생 가운데 과연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어본 학생이 몇이나 될까? 마르크스가 아니더라도 레닌, 힐퍼딩, 룩셈부르크, 트루츠키, 그람시, 마르쿠제 등 좌파이론가의 저서를 직접 읽어본 학생이 몇이나 될까? 아마 대학 내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운동권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착취를 부르짖고, 노동을 논하고, 혁명을 선동한다. 도대체 마르크스조차 읽지 않은 학생들이 착취가 무슨 개념으로 쓰인 것인지나 알고 말하는지 의문스럽다. 아마 그 학생들은 항변할지 모른다. '인터넷으로 강의 몇 개보고, 선배들이 전해준 팸플릿 좀 봤는데 말입니다’라고. 이들에게 자유경제원에서 열리고 있는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에 참석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다른 내용은 다 차치하더라도, 과거 열혈 운동권 학생으로 활약했던 선배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었나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비롯해 온갖 불온서적을 일본어판이든 해적판이든 구해서 밤새 공부하고 토론했던 그 분들의 과거와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불명의 자료와 대중선전용으로 만든 팸플릿을 쓰윽 읽고 있는 당신들의 오늘을 비교해보시라. 비록 그른 방향이었지만 대학생 시절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했었기 때문에 그 분들은 역사적 진실 앞에 겸허한 자세로 전향(轉向)이란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열혈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대학생에게도 안타까운 점은 없지 않다. 어려운 취업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학점 사수에 청춘을 바치는 학부생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과연 그들이 진정 대학에서 갖춰야 할 지식을 제대로 체화하고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과연 성적 A를 받은 학부생 중에 교과서를 정독하고 관련 논문과 참고자료를 찾아 열심히 공부한 학생은 몇 명이나 될까? 방학이 되었을 때 학기 중에 배운 이론과 지식을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까?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 교과서를 암기하고, 교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녹음해서라도 기억하려는 그 노력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러한 노력이 학기를 마무리하며 얻은 성적표의 A외에 스스로의 지식을 얼마나 살찌우고 있는지 한 번 돌아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의미 있는 지식이란 체화된 지식, 다시 말해 스스로의 사고와 논리를 동원해 타인의 지식을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경험의 결과물을 말한다. 시험 전날 밤새워 외운 책 내용을 시험 당일 답안지에 쏟아내고 내일이면 잊어버리는 그런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교수가 말하는 이론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옮겨 답안지에 담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대학생에게 기대하는 지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부족하지만 생각해보고 또 고민해보며 교수의 말을, 앞선 학자들의 지식을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공부요, 이를 통해 나의 지식을 넓혀가는 것이 지성인으로서의 대학생에게 요구되는 훈련이자 학습이다. 그런데 서울대 학생조차 A+를 받는 비결은 교수의 농담 한 마디까지 놓치지 않고 적어서 기억하는 것이라니, 실로 안타까울 현실일 뿐이다.
 
졸업한 후배 학부생에게 기억에 남는 전공지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아니요’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문과생에겐 전공지식이 취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직업인으로써 필요한 지식과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의 격차야 사회가 해결할 문제니 학생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대학에서 4년간 배운 지식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옳지가 않다. 비록 당장의 직무에 써먹을 수 없는 지식이라 할지라도 체계화되고, 체화된 지식은 업무를 하면서나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언의 도움이 될 수 있다. 구체적인 이론의 내용이나 개념은 기억에서 지워졌을지라도 그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스스로 세웠던 논리와 이해력은 그대로 남아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수학의 정석> 시리즈로 유명한 홍성대 선생의 말을 적어본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12년간 수학을 배웠지만 실생활에 쓸모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록 공식이나 해법은 잊어버렸을망정 수학 학습에서 얻어진 논리적 사고력은 그대로 남아, 부지불식중에 추리와 판단의 발판이 되어 일생을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다.”(<실력 수학Ⅱ의 정석>, 2002년 판 머리말)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이 삶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반드시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대학에서의 지식이 삶의 가치와 품격을 높이는데 일조하는 것 또한 진실이다. 거짓말로 점철된 광장의 선동, 아니면 말고 식 언론 보도, 그럴 듯하게 포장된 정치인의 감언이설에 부화뇌동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오직 개인의 지력에서 나온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급진적 운동권이 아니라면 지식에 대한 스스로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성찰해보기를 간곡히 권한다.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해지면 운동을 하거나 적절한 치료를 통해 건강해질 수 있다. 온 몸을 다해 사랑한 연인과 헤어져도 또 다른 좋은 인연을 만나 상처를 치유할 있다. 그러나 한 번 놓친 배움은 다시 얻기 힘들다. 우리는 흔히 이상적인 대학생의 조건으로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꼽는다. 오늘날 대학생에게는 뜨거운 열정은 넘치나 냉철한 이성은 부족한 것 같은 아쉬움이 크다. 지성인이라는 자부심에 걸맞은 지성을 갖춘 멋진 대학생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승 수 │ 연세대 대학원 언론학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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